현대사회 속 사랑의 부재(不在)에 대한 날카로운 고찰

 
 우리에게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는 사랑 이야기, F.스콧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
주인공 개츠비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데이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사랑이 아니라면 돈, 명예 그 어느 것도 필요 없었던 개츠비의 사랑은 누구보다도 순수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 앞에는 ‘위대한’이라는 형용사가 붙는다. 그가 보여준 사랑은 1920년부터 지금까지 1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수없이 회자되고 칭송받으며 사람들에게 귀감이 된다. 하지만 현대에도 개츠비가 보여준 순수하고 위대한 사랑이 존재할까?
이 책의 저자 한병철 교수는 현대사회에서 진짜 사랑은 부재한다고 말한다. 그는 사랑이란 ‘완전한 타자의 파국적 침입’이라고 정의 내린다. ‘너’가 ‘나’에게로 왔을 때, ‘나’는 정상적인 균형 상태를 잃게 된다. 연애를 시작함과 동시에 우리의 일상 속에 ‘그 사람’이 들어왔다고 느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누구나 물리적인 시간뿐 아니라 정신적인 시간, 즉 무언가를 하고 있는 중에도 머릿속에는 ‘그 사람’에 대한 생각뿐이었던 경험을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이에 한 교수는 ‘타자의 침입은 정상적인 균형 상태를 깨뜨리는 재난이지만, 그 재난은 동시에 자아의 공백과 무아 상태에서 오는 구원의 길이다’라고 표현하며 사랑의 힘과 중요성을 역설한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에로스 자체가 생겨날 수 없는 사회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랑하는 대상, 즉 ‘타자(他者)’의 존재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과(成科) 사회 속 사라져가는 타자

그렇다면 왜 타자의 존재가 침식되어가는 것일까. 타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의 주체가 확립되어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건강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한다. 현재는 이전의 ‘해야만 한다’는 당위의 규율사회에서 더 발전해 ‘할 수 있다’는 개인의 능력에 집중하는 성과사회다. 현대인들은 효과적으로 착취되기 위하여 동기부여, 자발성, 자기 주도적 등의 단어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프로그래밍 되었다. 같은 맥락으로 미셸 푸코는 “신자유주의의 ‘자유로워져라’라는 명령은 역설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착취하면서 자유롭다고 착각하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결국 이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겪는 실패와 좌절의 책임을 온전히 우리 스스로에게 돌리게 된다. 우리네 인생이 이토록 아프고 힘든 것은 사회적, 구조적인 모순 때문이 아닌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건강한 자아의 주체는 성립되지 못한다. 이처럼 자아의 부재는 타자의 부재로 이어지고, 결국 진정한 사랑은 현대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현대인들의 변질되어버린 사랑

현대인들은 타자를 통해 자아를 확인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에게 타자는 사랑의 대상이 아닌 단지 ‘주체의 자아를 확인해주는 거울’이다. 많은 사람들은 연애를 하면서 자신의 방식만을 고집하다 “나랑 맞지 않아”라는 변명으로 사랑을 끝낸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버리지 않으며 타자에게서 그저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한다. 하지만 저자에게 사랑은 인간에게서 고유한 본성을 빼앗고 그곳에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 과정이다.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 자아의 죽음 때문에 사랑의 본질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그 누구도 사랑으로 인한 상처와 고통, 즉 사랑의 부정성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자극적인 맛이 혀를 즐겁게 만들지만 몸에는 좋지 않은 인스턴트 음식처럼 사랑은 인스턴트화 되어가고 있다.
저자는 “긍정성으로 가득 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랑이란 그 고통과 상처마저도 향유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라며 사랑 역시 소비의 공식에 따라 길들여졌다고 비판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사랑을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 흥분과 쾌락으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는 ‘원나잇’과 같은 즉흥적 섹스가 왜 사회에 만연해졌는지를 설명해준다.

죽음을 통해 실현되는 진정한 사랑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의 최소 조건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절대적 결론으로서 사랑은 죽음 속을 통과 한다”라고 말한다. 사랑을 함으로써 우리의 자아는 사라져 죽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타자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진리를 의미한다.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때로 행동, 습관, 심지어는 생각하는 방식까지 바꾸어야 한다. 이렇듯 살아온 환경, 가치관도 다른 상대와의 상호 관계를 통해 우리는 전보다 ‘성숙한 나’가 될 수 있으며 그 과정은 지극히 아름답고 신성하다. 때문에 사랑을 위해서 사람들은 자아의 죽음도 불사하는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삶’의 노예가 되어 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죽음은 곧 자신들이 이룩한 것들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우리 안에서 사랑이 죽음과 같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자아의 죽음이 곧 자아의 소생이기에 진정한 사랑을 위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종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사랑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가치라는 점은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사랑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생동감의 원천이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하는 자본주의 세상 속 진정 두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운 가치다.
더 나아가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인간 실존의 해답’이라고 정의했다. 결국 나 자신을 불사르는, 타자를 향해 내던지는 그 사랑만이 내 존재에 대한 해답을 줄 것이며 또 다시 부활하는 진정한 자아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사랑이 종말을 고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새겨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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