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원 단위로도 측정할 수 없는 가치

▲ 광활하게 펼쳐진 그랜드 캐니언. 거대한 자연이 주는 경이로운 광경을 바라보며 자연스레 할 말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10년 이상을 알아 온 친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워낙 오랫동안 함께 해 온 친구들이다 보니 어릴 적 같이 공유했던 추억에 대해 종종 이야기가 나오는데, 오늘은 오징어로 만든 땅콩과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릴 적 오징어로 만든 땅콩과자를 너무 먹고 싶었던 나는 한 친구에게 50원이 부족하니 좀 달라고 했고 그 친구는 자기 돈이라며 절대 주지 않겠다고 해서 둘이 심하게 다퉜던 기억이 난다. 그 50원이 뭐라고, 우리는 아직도 그 때 이야기가 나오면, 누가 더 잘못했는지에 대해 장난스러운 토론을 한다. 그 시절 우리에게 50원이라는 돈은 참 중요했나보다.

Let’s go Dodgers, Let’s go!!

길고 거칠었던 남미 여행이 끝나고 세계여행의 마지막 여행지 미국을 가게 되었다. 페루에서 마이애미를 경유해 LA로 들어가는 비행기를 아주 저렴하게 끊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여행 자금이 많이 남아있었고, 조금 더 여유로운 생활을 기대할 수 있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아직 남아있는 여행 기간 동안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예상한 지출보다 더 적게 쓰게 될 수밖에 없다. 계획한 돈보다 항상 적게 쓰려 노력하다 보니, 마지막 여행지인 미국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돈이 남아있었다. 자본주의의 총체인 미국에서, 여유로운 자금에 기대감이 가득 부풀었다.
내가 미국에 갔을 때 류현진 선수가 메이저리그 활동을 시작하게 된지 얼마 안됐었는데, 그래서인지 LA의 한인민박에는 류현진 선수의 경기를 보러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나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민박집에 도착하자마자 관람석을 알아봤고, 이틀동안 VIP석과 외야석으로 예약했다. 첫날은 류현진 선수가 등판하진 않았지만 관람석이 VIP석이었기 때문에 정말 가까이서 경기를 관람할 수 있었다. “Let’s go Dodgers, Let’s go!! 짝짝짝!” 목청껏 소리지르며 TV에서나 봐오던 선수들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 희열은 대단했다.
다음날은 류현진 선수가 열흘만의 휴식 끝에 선발로 나서는 경기였고, 이번엔 외야석에서 LA다저스를 응원하게 됐었다. 하지만 전 날만큼 흥이 나진 않았다. 저렴한 가격의 좌석에 앉아서 그런지 전 날 앉았던 VIP석과 거리가 직접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오랜만의 류현진 선발은 패배로 끝이 났다. 경기장의 미국인들이 “Ryu OUT!!!”을 외쳐대는데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화려함 속에 감춰진 섬세한 소비 전략

▲ 사막 속 화려함을 간직한 라스베이거스
LA 다저스 경기도 보고 헐리웃 거리도 구경해보는 등 만족스러운 시간들을 보내고 나니 미국의 다른 도시가 궁금해졌다. LA에서는 라스베이거스가 가깝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접할 수 있던 곳이어서 미국에 가게 되면 꼭 한 번은 들리고 싶었던 곳이라 망설임 없이 버스표를 끊었다.
 라스베이거스의 거리는 화려하다. 아니, ‘화려함’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하기 부족할 정도의 화려함이 있다. 사막 한가운데 건설한 사치스러운 도시, 사막이라면 가장 부족해야할 물이 오히려 흐르고 넘쳐 유흥을 위해 쓰이는 곳. 라스베이거스였다.
물론 낮에도 흥미롭고 볼거리가 많은 곳이지만 밤이 되면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곳으로 바뀌게 된다. 끊임없이 춤추는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 쇼, 매 정시마다 화염을 뿜어내는 미라지 호텔의 화산 쇼 그리고 동화에서 방금 뛰쳐나온 듯한 해적들이 모험을 펼치는 트레저 호텔의 해적 쇼까지, 이 모든 것들이 무료로 관광객들에게 제공된다. 사람들은 이런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함에 매료되고 또 손쉽게 지갑을 연다.
라스베이거스는 길거리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이 허용되는, 미국에서 드문 도시이기 때문에 얼마 안 되는 가격으로 소소한 자유를 만끽할 수도 있고, 오쇼, 카쇼, 스트립쇼와 같은 다양한 공연에 돈을 쓰며 조금 더 품격 있는 문화생활을 즐길 수도 있다. 난 오쇼를 관람했는데, 이 곳 역시 관람석의 가격이 다양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만약 이런 문화생활이 질리려 한다면, 언제든지 호텔 로비에 들어가 카지노를 즐길 수 있다. 사람들은 1달러의 기적을 꿈꾸며 레버를 당긴다. 호텔 방에 들어가려면 항상 호텔 로비의 카지노를 지나가야 하는데, 돈 쓰는 데 맛을 들인 사람이라면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유혹의 구조라 할 수 있다.
미국은 소비자의 능력에 따라 즐길 거리가 정말 세심하게 나누어져 있다. 각종 투어부터 시작해 내가 즐길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까지, 마치 50원의 단위로 모든 소비를 쪼개놓은 느낌이 들게 한다. 내가 만약 상대방보다 10만원을 더 가졌다면, 그 10만원의 가치와 기회를 더욱 세심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듯 미국은 돈 쓰는 재미를 선사해주는 나라이기도 하면서 돈이 얼마나 날카로운 지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나눌 수 있는 가치 vs 측정할 수 없는 가치

사실 돈에 따른 행복이 얼마나 오래갈 것인지에 대해 회의감을 가졌었지만, 미국의 화려한 자본주의 생활을 겪어본다면 내가 가진 돈에 따라 나의 행복의 양도 결정되어버릴 것만 같은, 돈이 없으면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만약 돈이 넘쳐난다면, 아무리 단기적인 행복이라도 계속해서 느끼고 만족해 그것 또한 행복이 될 것 같은, 그래서 돈이 인생의 최고 목표가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만다.
물론, 사람마다 행복의 가치는 주관적이고 다양하기 때문에 무엇이 더 중요하고 행복할지를 정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국을 여행하며 들었던 생각은 돈만으로 얻을 수 있는 가치는 단기적이고 자극적이다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더 좋은 가치들이 항상 공존하고 있다. 50원의 단위로도 측정할 수 없고 나눌 수 없는 큰 가치들이 존재한다. 이 시대의 자본주의 흐름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고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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