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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3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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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광야 교수의 한국의 도시 <10> 한반도 중심으로 통하는 길, 전주 ②조선 왕실의 근거지, 한옥마을로 남다

   
▲ 전주 한옥마을. 1970년대 한옥 보존을 위해 철저하게 관리되어 왔다.
 조선시대 전주는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전주 이씨의 고향으로, 상징적인 위상을 갖고 있었다. 당시 전주는 고려시대 전주목성의 규모를 유지해 전주부성으로 불렸다. 전주부성은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는 어용전(御容殿)ㆍ경기전(慶基殿)을 조성하며 확장됐고 1734년(영조 10)에 개축되어 지속적으로 확장됐다.
한편 전주부성에는 광역권의 전라도와 전주의 행정을 담당하는 일련의 지방행정 시설들이 밀집해 조성됐다. 한 도시 안에 ‘왕실’과 ‘지방행정 거점’이라는 서로 상이한 상징 및 행정 프로그램들이 자리하고 있어 조선시대 전주는 오늘날의 연구자들에게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최초의 시장을 열다

전주는 조선 최초로 시장이 열린 곳이다. 한반도에 시장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의 1470년 전후이다. 이후 한반도에는 다수의 지방 장시들이 형성됐다. 1809년(순조 9년)을 전후로는 1,061개의 시장이 작동하였다.
이때까지 조선의 시장은 군중의 반란이 모의되는 장소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앙정부의 강력한 규제를 받았다. 이러한 시장 활동의 규제는 1473년(성종 4) 신숙주가 쓴 성종실록을 통해 확인된다. 이후 중종은 시장 활동을 전국적으로 금지 규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농민의 생존을 위한 자연 발생적 장시를 묵인하였다.
지형적 특성상 전주는 동쪽의 노령산맥으로부터 오는 산의 물자들과 서쪽의 호남평야로부터의 물자들이 모일 수 있었기에 큰 시장이 형성될 수 있었다.
5일장과 10일장의 정기시장이 열렸고, 정기시장과 함께 부내대장(府內大場)으로 불렸던 상설시장과 정해진 기간에 열리던 특별시장인 악령시가 열렸다. 
이 시장들은 결국 전주의 성장과 위상을 높였다. ‘호구총수(1789년(정조 13)’에 의하면 전주는 1789년을 전후로 20,947호를 갖고 있어 한양, 평양에 세 번째 큰 도시였으며, 인구는 72,505명으로 한양, 평양, 의주, 충주에 이어 다섯 번째였다. 

순교자들의 성지, 전주

한편 전주는 1700년대부터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프랑스 카톨릭 선교사들과 미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의 활동거점이 됐다. 당시 전라감영의 전라관찰사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천주교인들을 통제했으며, 구 전라북도청 2청사를 감옥으로 사용했다. 1791년(정조 15)부터 시작된 조선의 가톨릭 박해에 따라 전주의 전동성당(殿洞聖堂), 초록바위, 치산성지, 숲정이 부지들은 순교자들의 박해와 참형의 성지가 되었다. 호남의 첫 사도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 윤지헌(프란치스코) 등도 역시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도 선교의 맥은 이어졌다. 프랑스의 캐톨릭 신부 보드네윤(Baudou-
net)은 1889년 전주에 부임하여 현 전주천의 남쪽인 서서학동에서 처음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풍남문 바로 남쪽의 장소에 전동성당(殿洞聖堂, 1908-1914년)을 조성했다.
남장로파의 선교사들도 서문교회(1893년)와 남문교회(1905년)를 조성했으며, 전주천 서쪽에 구성된 선교사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의료와 선교교육을 진행했다. 미국에서 온 여의사 마티 잉골드(Dr. Mattie B. Ingold)는 1898년 은송리(현 완산초등학교 부근)에서 처음으로 의료외래진료를 시작했다.
또한 예수병원(1902년), 희현당 신흥학교(1901년), 기전여학교(1907년 전주기전여자학교로 개명), 여성성경학교(1961년 전주한일여자신학교로 개명) 등이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 1867-1951), 루이 테이트(Lewis Boyd Tate, 1862-1929), 매티 태이트(Mattie B. Tateㆍ최마태, 1867-1962) 등의 선교사에 의해 조성됐다.

조선을 간직한 한옥마을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전주 한옥마을은 전주향교와 남부시장을 중심으로 19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됐다. 당시 조성된 마을은 기존 농촌에 조성된 일반적인 전통한옥마을이 아닌, 도시의 격자형 슈퍼블록 내에 좁은 필지와 골목을 두고 조성된 도시형 한옥마을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전주는 1976년 ‘전주이조문화권 개발계획’을 수립했다. 이후 1977년 전라북도청은 이를 실현화하기 위해 ‘한옥보존지구’를 지정하며 신축건물로 한옥만을 허가하는 강력한 행정명령(전라북도 고시 제73호)인 조닝규제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전주의 한옥을 지역의 역사문화유산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모티브에서 비롯됐다. 당시 전주에는 약 800여 채의 도시한옥들이 독특한 도시경관을 형성하며 인접한 풍남문-경기전, 전동성당-오목대-향교를 묶어 역사도시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 있었다.
한편 2000년대에 다시 한옥보존 도시계획들이 추진됐다. 지역사회 경제활동이 현저하게 저하됐고, 주민들 자체적인 한옥관리능력이 부족하여 건축물의 노후화가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2002년 월드컵의 개최를 전후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한옥의 원형보전’을 했다는 사실을 통해 전주의 정체성 확보와 지역 활성화에 기여하겠다는 전주시의 확신의 결과였다.
이후 공공 문화시설들이 신축되고 정비됐으며 인접한 문화시설과의 연계를 통해 시민들의 한옥마을 문화체험의 기회를 높이고 관광지로서의 기능을 부각시켰다. 특히 2006년부터 한옥마을의 보조금을 지원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한옥보수에 크게 기여했다.
 

한광야  공과대학 건축공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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