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촌락, 후백제의 수도로 성장해 40여년을 지키다

▲ 팔달로·국도27과 연결된 이곳은 후백제 때 쌀시장이 열려 싸전다리로 불렸다.
 

 전주(JunJoo, 全州)는 한반도 중앙 내륙으로부터 서해로 흘러 나가는 만경강과 범람이 잦은 상류지류인 전주천 변의 퇴적지에 입지하고 있다. 동, 서, 남쪽에 산과 구릉이 두르고 있으나 북쪽 만경강이 트인 'U'형의 지리적 특성을 갖고 있다. 만경강변으로는 넓은 만경평야가 펼쳐진다.
만경강 유역과 남고산 기슭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지인 지석묘 등이 발견된다. 이를 볼 때 전주는 청동기시대부터 초기 농경문화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전주에는 삼한시대에 마한의 땅이 되어 3세기경 처음 마을이 형성됐다. 

 

작은 촌락의 성장

삼한,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 역사 속에서 전주는 서로 다른 거점 기능을 가지고 작동했다. 삼한과 백제 때 전주는 완주지역의 지리적 중심부였으며 쌀 생산을 중점적으로 했던 지역시장권의 중심부였다.
그러나 전주는 삼국시대 6세기까지만 해도 익산에 속한 마을로 완산(WanSan, 完山)이라는 작은 촌락이었다. 전주가 만경강 지역에서 지방행정의 거점으로 부상한 것은 685년(신문왕 5)때 부터다. 이 시기에 통일신라는 확장된 영토의 지방행정을 위해 완산주를 설치했다. 또한 ‘9주 5소경’에 근거한 지방행정의 거점체계를 구축했다. 이후 757년(경덕왕 16)에 완주는 중국식 지명인 전주로 개명됐다.
이로써 통일신라 때의 전주는 경주로부터 한반도 동-서 방향을 연결하는 지방행정거점이 됐다. 전주는 현재 국도17로 자리잡은 경로를 통해 고구려의 조물성(안동과 상주 사이 일대)과 신라의 고창ㆍ안동, 그리고 현 국도26 경로를 통해서는 신라의 공산(대야ㆍ대구)으로 연결됐다. 또한 현재 전주원도시 부지에는 완산주성이 있어 전쟁시에 방어요새로 작동했다.

 

전주, 후백제의 수도로

892년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전주를 수도로 삼았다. 이후 전주는 936년까지 46년 동안 후백제의 수도 역할을 했다. 통일신라 때 전주가 평지에 형성된 것과 달리, 후백제 때는 구릉에 세워져 산성의 형태로 기능했다.
견훤은 이 구릉지를 중심으로 동고산에 왕궁이며 요새인 동고산성(東固山城)을 조성했다. 또한 고덕산에는 고덕산성(高德山城)ㆍ남고산성(南固山城)ㆍ견훤산성을, 황반산ㆍ홍산에는 서고산성(西固山城), 북고산성(北固山城)을 세웠다. 또한 각 산성에 동고사, 서고사, 북고사ㆍ진북사, 남고사 등의 불교사찰들이 조성됐다.
전주는 남쪽과 동쪽에 산이 있고 전주천이 중심을 관통하여 북서쪽으로 흘러나가는 지형이기에 풍수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때문에 견훤은 1080년 현재 덕진공원 부지에 인공연못인 덕진제(德津堤)를 조성했다.
이후 조선시대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1754~1825)는 전주부성의 기맥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현재 시외버스터미널 주변과 진북1동 현 진북동 동국아파트 주변에 비보(裨補)숲을 조성하기도 했다.

 

한반도 중심으로 통하다

983년(성종 2) 고려 때 전주는 새롭게 조성된 지방행정 거점인 12목 중에서 전주목으로 자리잡았다. 12목의 도시들은 당시 수도였던 개성과의 연결을 중요시했다. 이렇게 한반도 북-남 연결은 바로 고려시대부터 시작됐다.
고려 때 전주는 개성과 나주를 연결하며 북-남 루트의 중심이 됐다. 또한 호남지방의 인후부로서 목포와 제주도를 연결했으며 전주역을 포함한 다수의 역참(驛站)을 갖게 됐다. 현 국도1 경로를 통해서는 익산 금마면의 미륵산 다듬재(아리랑 고개)와 공주, 천안, 한양으로 연결됐고, 남쪽으로 장성, 나주, 목포, 갈재를 지나 나주-제주 또는 광주-전라우수영(해남)으로 연결됐다.
고려의 전주목성은 통일신라 완산주성과 같은 부지에 유사한 규모로 조성됐다. 이후 전라도관찰출척사(관찰사)인 최유경(崔有慶)은 전주목성을 개축하기도 했다. 전주목성 내부에는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목사의 지방행정시설과 거주시설이 있었고, 곡식을 보관하며 물가를 조절했던 상평창(常平倉)이 기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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