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소소히 지는 조락의 계절이다. 화려한 벚꽃에 대한 기억이 퇴색한 낙엽보다 더 희미해져갈 때 우리는 문득 제행무상을 깨닫는다.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기에 ‘금강경’에서는 모든 존재는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부질없고, 번쩍하고 사라지는 번개처럼 한 순간이라고 했다. 이처럼 시간은 모든 것을 잡아먹는 괴물이기에 ‘무상살귀(無常殺鬼)’라고 했다. 그런 무상을 깨닫지 못하면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 신세가 되는 것은 한 순간이다. 그래서 티베트의 성자 쫑까파는 “죽지 않는다고 고집하는 것은 타락의 문이고,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원만한 문”이라고 했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무상의 광풍 속에 서 있는 인간의 실존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외면하거나, 설사 죽더라도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쫑까파는 그런 생각에서 타락의 문이 열린다고 했다. 무상을 깨닫지 못하면 두 가지 장애가 온다. 하나는 이루지 못한 꿈을 방해하는 마장이다. 삶은 영원하고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태함이 비집고 들어오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게 된다. 둘째는 이미 가진 것에 대해 집착하게 만든다. 오래 살 거라는 생각, 내 것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집착은 강고해지고 삶의 고통은 깊어진다.
반면 언젠가 죽을 존재라는 생각은 원만한 문을 열게 한다. 그런 생각으로부터 스스로 겸손해지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게 되고, 육신과 물질에 대한 집착을 해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이긴 개선장군이 행진할 때 말고삐를 쥔 하인에게 ‘Memento mori’를 외치게 했다. ‘죽음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쫑까파는 죽음에 대해 세 가지로 명상하라고 했다. 첫째 반드시 죽는다고 생각할 것, 둘째 죽을 때가 정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할 것, 셋째 죽을 때에는 불법(法) 말고는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죽음이 예정된 한시적 존재들이다.
돈과 권력 그 무엇으로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더구나 죽을 날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누구나 백년을 사는 것은 아니다. 내일 우리의 삶이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생각이 여기에 이를 때 우리가 서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결국 무상과 죽음을 명상하는 것은 삶의 부질없음이나 죽음의 허무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충실하기 위함이다. 그 때 타락의 문은 닫히고 성취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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