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창화 민족사 대표.

‘불성(佛性)’이란 ‘깨달을 수 있는 성품’을 뜻한다.
즉 깨달아서 부처님과 같은 분이 될 수 있는 속성을 뜻한다. 또는 여래(부처)가 될 수 있는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에서 ‘여래장(如來藏)’이라고도 한다. 대승경전 가운데 하나인 『열반경』에서는 “일체중생(사람)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불성을 갖고 있다”고 선언했다. 지능지수나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누구나 태생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을 갖고 태어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열심히 수행만 잘한다면 누구나 다 깨달을 수 있고 부처가 될 수 있다. 이것을 ‘불성사상’ 혹은 ‘여래장사상’이라고 한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중국선에서는 불성이란 ‘본래청정심(本來淸淨心, 본래 청정한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누구든 오염된 생각이 사라진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면 그것이 깨달은 것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곧 부처다(卽心是佛, 心卽是佛)” 또는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다(心外無佛)”는 말은 모두 ‘본래 청정한 마음(本來淸淨心)’이 곧 불성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불자들 가운데는 불성을 영혼과 같은 것으로 혼동,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불성=‘불성’이란 앞에서도 보았듯이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함에도 불구하고 불성과 영혼을 동일시하는 것은 불교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정견, 정법안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착각과 오류는 불성에 대하여 설명할 때에 ‘깨달을 수 있는 속성’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추상적으로 “내 안에 있는 불성을 찾아라”, “불성은 모양도 색깔도 없고, 불에 타지도 않고 물에 젖지 않는다.”는 표현이 영혼과 혼동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불성을 우리의 육체 속에 있는 어떤 하나의 무형의 실체, 즉 아트만과 같은 존재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불성과 아트만은 그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불성=영혼으로 본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영혼을 깨닫자는 것이 된다.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아니면 어떤 세계인지, 그런 것을 깨닫자는 것밖에 더 될까? 설사 영혼이 있다고 해도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을 뜻하는 불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본질적으로 다르다.
만일 영혼을 불성으로 본다면 부처님을 비롯한 달마·혜능·원효 등 역사상 위대한 고승들은 고작해야 영혼의 세계를 깨달은 것에 불과하게 된다. 영혼은 누구보다도 무속인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신이나 영혼을 부리기도 한다고 한다. 굳이  부처님 말씀이나 경전을 듣고 읽을 필요도 없이 그들을 찾아가 영혼의 세계에 대하여 묻는 것이 깨달음의 첩경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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