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열 미술학부 교수.
얼마 전 미 항공우주국(NASA)은 지구에서 1400광년 거리에 태양계 시스템과 비슷한 ‘쌍둥이 지구’를 찾았다고 발표했다.
이 발견은 로켓에 실려 우주로 발사되어 지구 밖에 설치되어있는 케플러 망원경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2600년 전 붓다는 이미 광활한 우주의 진리를 통찰했으며 서쪽으로 10억만 국토를 지나면 서방정토가 있다고도 했다. 경전에서는 이를 ‘불안(佛眼)으로 본다’고 한다.
불안은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을 다 갖추고 있으며 사물의 현상계를 바르게 보는 눈이다. 우리 중생은 감히 불안의 경지는 넘볼 수 없으나 ‘천안’으로는 세상을 보고 인생을 파악할 수 있다. 천안은 심안(心眼)이라고도 하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눈이기 때문이다.
우주 대자연 중에는 신비롭고 오묘한 존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를 이성적인 방법으로 해석하기 위해 나타난 학문이 바로 자연과학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과학자들이 우주를 연구하고 분석했으며 지금도 그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와 예술에서는 우주를 분석하고 연구하지 않으며 증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기의 생명상태와 우주의 오묘하고 신비함을 하나로 융합해 낼 수 있는 이성을 초월하는 인식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이를 ‘깨달음의 방법’ 혹은 ‘창의성’이라고 하는데 부처가 들어가 있다는 우리의 본성을 보고 자아를 실현함이다. 인류를 이끌어가는 모든 창의적 활동은 자기실현을 위한 욕망에서 나왔다. 붓다의 자아실현의 욕망은 ‘불안’의 경지를 이루었다.
우리의 욕망실현을 위해서는 ‘육안‘을 넘어 ‘천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할 것이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한다. 산하대지가 그렇고 하늘의 별들이 그러하다고 붓다는 우리를 가르쳤다.
남이 본 세계로는 변화를 이끌 수 없다. 내 스스로의 눈으로 나의 관심과 호기심을 좇아 살아야 한다. 내가 나를 보고 나로서 사는 것이 곧 ‘천안통’이며 자아의 실현 아니겠는가? 이 때 인생은 비로소 행복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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