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 속에 찾아든 정신적 위기

 

繁榮(번영) 속에 찾아든 精神的危機(정신적위기)
六年(육년)만에 다시 본 西歐(서구) <下(하)>
<佛敎大敎授(불교대교수)>
□李箕永(이기영)□
 
 
독일인 간호원들은 모두가 초등학교 졸업정도의 낮은 교육밖에 받지 않은 사람이라 교양의 차가 있으며 월급의 차가 또한 많아 상호간에 질토가 오고가는 모양이었다.
 
어떤 유학생하나가 세계의 은행에서 바꿔주지 않는 돈은 우리나라돈뿐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다소 에누리하고 들어야할 이야기 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사람’가치가 유우럽에서는 ‘일꾼’정도로 밖에 평가되지 않는다면 다소 과장된 이야기 일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식모아기’는 ‘少女(소녀)’가 아니라는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家系(가계)나, 門閥(문벌)도 문제가 아닐 것이다. 돈있는 집안에 태어났어야 할 것이다. 글ㄴ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휴머니즘’도 ‘종교’도 ‘신학’도 ‘진보파’도 ‘보수파’도 좋지만 ‘유우럽’의 생활원칙 인생기준은 돈에 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태양이 일찍 뜨는 것이 최대의 ‘프레스티쥬’인 東方禮儀之國(동방예의지국)의 선비들은 그것을 배우려 北極(북국)의 凍土(동토) 위를 날라갔던 것 같은 쓴 뒷맛을 맛보아야만 햇던 것이다.
 
나느 ㄴ다시 오스트리아로 갔다. 오스트리아의 서울 ‘빈’은 아름다운 도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빠리에 비할 수는 없다. 빠리는 밝아지고 있었다. 이전에는 밝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빠리는 젊고 명랑하고 그러면서도 애수가 서려있는 도시였다. 그러나 이제는 지난 날 빠리의 특색이었던 그 시꺼먼 벽의 때가 깨끗이 닦이지고 있는 것이다. 들의 누런 原色(원색)이 들어나고 있다. 프랑스의 文化相(문화상) ‘앙드레·말로’는 법령으로 빠리의 모든 건물의 壁(벽)을 닦도록 분부하였다 한다. 빠리의 그 哀愁(애수)가 다소 살아지는 效果(효과)가 날려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것을 드·골은 노리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프랑스’ ‘젊은 프랑스’ ‘영광스런 프랑스’ 프랑스 전체를 하나의 招人宗拜(초인종배)의 狂熱的(광열적)분위기로라도 들고가겠다는 소리인 것이다.
 
빠리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책방 巡禮(순례)에 나섰다. 낯익은 거리들, 낯익은 사람들이 나를 반겨맞는다.
 
나는 그 숱한 新刊(신간)의 책들을 嘆聲(탄성)을 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6년동안에 이렇게 많은 저술들을 할 수 있었던 프랑스 학자들의 노력과 재간에 놀랐다. 나는 있는 돈을 다 털어 책 몇 卷(권)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와 책장을 들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다시 한 번 프랑스인들의 요설벽에 접하고 실망을 禁(금)치 못하였다. 그들은 확실히 말이 많다. 남이야 말이 많던 적던 무슨 상관이냐고 할테지만 그들이 쓰는 것에 대해 항상 부단한 주의를 기울려야하는 우리자신의 호주머니가 너무나 가볍고 보면 우리와 상관이 없을 수도 없다.
 
불란서는 알제리 아이들에게 독립을 주고 난 뒤부터 더욱 잘 살게 되엇다고들한다. 그것은 거의 눈에 띄일 정도이다. 그러나 독인에 비하면 아직 가난이 구석구석에 남아있다. 극동학생들의 한 기숙사는 말할 수 없이 파락한체 몇십년을 그냥 혹사당하고 있는 듯 싶었다.
 
불란서에 종교적 정신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은 이러한 고통의 조건이 살아지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필자는 母校(모교)가 있는 벨지움을 보기위해 잠시 빠리를 떠나 한 일주일간 ‘브랏셀’과 ‘루뱅’을 다녀왔다. ‘콩고’를 잃은 벨지움의 경제사정도 결코 악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개인들의 생활은 더욱 번영일로를 걷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가톨릭적 사랑과 평화의 정신을 고취하는 ‘루뱅’ 大壑(대학)은 言語(언어)싸움의 도가니가 되어있었다.
 
두 가지 다른 말을 쓰는 주민이 사는 이 나라는 두 개의 公用語(공용어)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루뱅’大學(대학)도 두가지 公用語(공용어)를 따로 使用(사용)하는 두 개의 ‘쎅숀’으로 나뉘어있었는데 그것이 얼마전부터 말썽이 되고 있는 것이다.
 
‘루뱅’이 ‘플레밋슈’말을 쓰는 지방이니까, 여기서는 불란서 말을 써서는 안된다는 고집을 부리는 움직임이 생긴다.
 
2千(천) 명을 수용할만한 대식당과 수많은 학생기숙사, 교수회관등이 초현대식으로 신축될 정도로 굉장한 시설면의 발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 사람들의 정신적분위기는 옹졸하고 편협하고 더러웠다. 나는 그곳에 머물은 며칠동안에 거의 질식할 정도의 구토감을 느꼈다.
 
빠리로 다시 온 뒤 나는 中部(중부) 불란설의 한 山中(산중)의 ‘샤또’에서 열리는 한수양회에 참석하였다. 피곤도하고 경제적 여유도 별로없고하여 누차 거절하였으나, 와서 이야기도 해주고 조용하게 책도 읽으라는 옛친구의 권유에 못이겨 그곳에 간 것이다. 하늘을 찌를듯한 나무가 욱어진 숲에 둘러싸인 山(산)허리에 1年(년)에 한번 밖에 안쓰는 큰 城(성)이 있다.
 
거기에는 큰 房(방)들만도 20個(개)가 있다. 창고등 부속건물까지 동원하고 또 들판에 천막을 치고 약 1백 50명이 宿食(숙식)을 같이 하면서 일주일 간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종교란 제목을 가지고 강의 및 토론들을 진행시켜갔다.나는 7년 전의 회합에 비하면 너무나 많은 실망을 주었다.
 
위선 남자 참석자가 적었으며, 대부분의 참석자들도 수양보다는 오히려 휴가를 즐기려 온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토론은 흔히 비관주의적 결론으로 흘러가고 마는 느낌조차 있었다.
 
나는 여기서 낡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叛旗(반기)를 현대 西歐(서구) 젊은이들의 精神狀況(정신상황)에 接(접)했다. 종교의 ‘世俗化(세속화)’ 혹은 불란서 말로 Desacralization이라는 現象(현상)이 일어나 지난날 ‘거룩하고 神祕(신비)의 베일을 베끼는 움직임이 시작되자, 西歐(서구)의 宗敎(종교)는 단순한 휴머니즘으로 떨어져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휴머니즘은 때때로 올바로생각하는 이들사이에서는 불교적 휴머니즘과 비슷한 境地(경지)에로 유도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起信論(기신론)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좀처럼 알아듣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내 걱정은 거의 기우이었다. 그들은 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는 思考方式(사고방식)이건만 확실히 참신하고 깊은 眞理(진리)에 접한 듯 기쁘다고 했다.
 
나는 이 山中(산중)에서 새로 사가지고 온 책들을 읽으며 보이지 않는 전투를 개시했던 것이다. 잠들지 못한 며칠이 있었다. 攻擊(공격)과 방어가 제대로 순조롭게 진행이 되지를 않은 것이다. 아니 나는 아직도 그 무시무시한 攻擊(공격)을 成功的(성공적)으로 방어하고 더 나아가 進一步(진일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나는 실제로 西洋(서양)에서 무엇인가를 배워가고져 하였다. 그러나 나는 實(실)속은 없지만 말이 많은 그 攻擊(공격)을 어떻게 방어할까를 나 스스로 배우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안 이상 더 西洋(서양)에 오래 머물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나에게는 지금 나의 戰線(전선)을 整備(정비)하는 것 以外(이외)에 더 급한 일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서 우리의 戰友(전우)들에게 알리고 協調(협조)하는 일을 서둘러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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