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리 학교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위치에 있다. 남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어서 도심 속에서도 사계절 자연을 느끼기에 좋다. 봄에는 흩날리는 꽃잎을 맞으며 벚꽃터널을 걷고, 요즘 같으면 녹색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연초록에 흠씬 빠져볼 수 있다. 알록달록 단풍과 눈 덮인 소나무도 책에 지친 우리들을 언제라도 반겨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그런데, 우리 학교는 자연과 가까울 뿐 아니라, 주변 곳곳이 살아있는 역사의 학습장이다. 먼저, 장충단공원에는 이준 열사의 동상이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빌던 박문사가 있던 자리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그 옆에는 이한응 선생 기념비가 있다. 구한말의 외교가로 조국의 멸망이 눈앞에 다가오자 열사들 중에서 가장 먼저 목숨을 던진 의인이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 5월의 일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학교로 올라오면 사명대사 동상이 있다. 불교가 탄압받던 시대였건만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나 왜적을 물리친 영웅이다. 특히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일본으로 가서, 포로로 잡혀간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귀국할 때의 신출귀몰한 행적은 언제 들어도 통쾌하다.
후문 쪽으로 내려가면 서애로를 만나게 되는데, 임진왜란 당시의 명재상 서애 류성룡의 집터가 인근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길 이름이다. 이어지는 충무로는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기 위함인데, ‘명보극장’ 앞이 이순신 장군의 생가터이다. 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류성룡의 천거로 이순신이 종6품에서 무려 일곱 계단이나 건너 뛴 정3품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할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지날 때마다 옷깃을 여미게 되는 곳은 남산골 한옥마을 입구에 있는 ‘한국의 집’ 자리이다. 이곳은 조선 전기의 문신 박팽년의 집터인데, 그는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해 처참된 70여 명 중에서도 특히 숭앙받는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그가 남긴 시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가마귀 눈비 마자 희는 듯 검노매라/ 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오랴/ 님 향한 一片丹心이야 고틸 줄이 이시랴”
학교 주변에서 이렇듯 저항의 역사와 마주칠 기회가 많으니 자연히 학생들이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었으리라. 4·19혁명 당시에도 자유당 정부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경무대로 맨 앞장서서 몰려간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2015년 봄에도 동악의 캠퍼스에는 저항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대학의 자율을 지키려는 결기, 학문적 윤리를 고양하려는 몸부림이다. 학생들의 간절한 외침도 위인들의 그것처럼 훗날 의로움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하여, “(전략) 언제나 이 민족의 정의에 앞장서고,/의리와 인정에 투철하고,/엉터리 학문은 절대로 하지 않는/우리 동국대학교의 오랜 학풍을 우리는 믿나니,/무한히 계속될 이 민족사 속에서/모교여 늘 건재키만 하소서!” (미당 서정주 - 동국대학교 100주년 기념 축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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