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화 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숫개마냥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

 

미당 서정주(1915~2000) 탄생 100년이다. 서정주는 70년에 이르는 창작기간 동안 1천 편의 시를 남겼다. 그 1천 편의 장관, 1천 편의 황홀. 피 끓는 청년기에서 원숙한 달관의 경지까지 우람차게 뻗어나가는 천년신선 시신(詩神)의 숲. 겨레의 5천년 역사와 세계 전역을 떠돌아다닌 광활한 시심(詩心)의 바다.
미당으로 인해 한국어는 보다 풍만하고 새로워진다. 으밀아밀한 생의 기미는 우리의 혼을 흔들고, 소리의 둔중한 공명과 잔떨림은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다. 겨레어의 축복이요, 언어의 문화재다. 시를 읽자. 미당을 읽자. 축복의 문신을 심장에 새겨보자. 
‘자화상’은 스물세 살에 쓴 시. 정직하고 용감한 목소리가 새삼 시원하다. 자기정체성에 대해서 끝없이 묻는 청년. 세상을 향해 자신을 천명하고 선언하는 용기. 분투하고 노력하는 실천행동. 오늘의 청춘들에게도 ‘자기 몫의 생’을 찾으라고 권고한다.
그대 뉘우치지 않는 청춘을 꿈꾸는가. 평생 동안 그 일을 사랑할 수 있는가. 시인이 그 방법을 가르쳐준다. 나를 키워왔고 앞으로도 키워갈 보이지 않는 내적 동력을 찾아서 불러보라. 이름 불러야 하나니 그 순간 그대는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열정’, ‘… 팔 할이 봉사’, ‘…장애물’, ‘용서’…. 자신의 원천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새롭다. 
미당은 본교 35학번 선배이자 종신 명예교수. 캠퍼스 곳곳에 모교 사랑의 목소리 넘쳐흐른다. 도서관 현관 입구 상층 벽면에 새겨진 모교 축시는 세상의 모든 축시 중 압도적인 최고일등. 동국의 종에 새겨진 ‘뭇 목숨’ 시어는 ‘중생(衆生)’이라는 어려운 한자어의 일상 구어. 정각원 오르는 계단 코끼리상 앞 석판에 새겨진 흰 코끼리 우렁찬 목소리는 사자와 호랑이를 굴복시키는 언어의 주술일레라.
윤재웅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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