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와 백제가 다듬은 비옥한 영토, 통일신라의 품으로

▲ 남원 시내의 모습과 교룡산. 교룡산에 있는 교룡산성은 백제 때 조성됐다.
남원은 지리산과 덕유산 사이의 운봉(雲峯)을 넘어 전라도와 경상도가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한다. 영남과 호남을 나누는 지리산 북쪽사면의 길목(국도24)에 위치한 도시인 것이다. 때문에 남원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와 백제의 격전장이었으며 군사기지가 되었다. 물론 이 길을 통해 전라도와 경상도의 물산이 오고 갔으며, 불교와 유교가 전파되기도 했다.

가야·백제·신라가 만든 남원
남원은 먼 동쪽에는 지리산, 북쪽에는 장안산을 두고, 가까운 서쪽에는 교룡산(蛟龍山)·기린산(麒麟山)·허산을, 그리고 동쪽에 섬진강의 최상류천인 요천(蓼川)과 덕음산(德陰山)을 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충적분지이다. 당시 전북지역에서 연중 벼농사 수확량이 가장 높았다. 때문에 백제와 신라는 640년을 전후로 이 남원계곡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남원은 외세가 한반도를 침략할 때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군사거점이었다. 실제로 몽고군은 6차 침입시인 1256년(고종 43)에 충주를 거쳐 남원을 침략하였으며, 왜군은 고려말기인 1380년(우왕 6) 황산대첩(荒山大捷), 조선중기 임진왜란-정유제란(1592-1597년) 때 모두 한반도의 중심을 침략하기 위해 상주와 남원을 거쳤다.
남원의 입지는 지리산과 섬진강을 영토로 삼았던 마한과 가야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남원의 형성은 백제와 신라의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남원은 본래 마한의 고랍국, 5세기 이후 가야의 하기물(下奇物), 6세기 초 백제 고룡군(古龍郡)의 영토였다. 백제는 196년(초고왕 31)부터 이후 561년간 이곳을 대방군(帶方郡)이라 불렀다. 이후 통일신라는 757년(경덕왕 16) 백제의 대방군을 남원(南原)으로 개명했으며, 현재까지 이 지명이 유지되고 있다.

백제, 교룡산성 건립
남원은 그 형성 초기부터 지방행정의 치소였으며 산성과 도성이 함께 존재하는 지역방어의 요새였다.
앞서 밝혔듯 남원은 6세기 전반 백제와 가야, 그리고 이후에는 백제와 신라의 전쟁터였다. 백제와 신라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목인 운봉(雲峯)을 두고 대립하였다. 운봉은 남원을 통해 신라의 경주로 가는 길목(국도24)으로 합천(陜川)과 밀양을 지나 울산으로 연결되었다. 백제는 이 즈음 남원 북서쪽 교룡산에 교룡산성을 조성했다.
교룡산성은 백제가 조성한 군사방어요새로서, 위기시의 이 지역 주민들의 대피소로서 기능했다. 한편 신라는 현 운봉 주변의 모산현(母山縣)에 대야성(大耶城)을 조성하였다. 백제는 642년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해 승전하며 남원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이후 660년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제압하면서 남원은 다시 신라의 영토가 됐다.
백제의 교룡산성은 타원의 형태로서 장축의 길이는 약 400m이며 둘레는 약 3,100m(1,125보), 성벽높이는 4.5m였다. 교룡산성 안에는 사찰, 군창 등을 두었으며 사방에 4개의 문이 있었다. 내부에는 천이 흘렀으며 샘이 6개, 우물이 99개 있었다.
임진왜란 종료 후 1596년 당시 승병장 처영(處英)은 교룡산성의 성벽을 보수했다. 1597년 정유재란 시에는 곡식창고인 곡성창, 생필품 창고인 산창, 무기고인 군기, 소금 창고인 염고 등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곧 왜군의 교룡산성 점령을 막고 평지전투를 하기 위해 다시 성벽과 시설들을 자체적으로 파괴하였다.
1890년대에는 동학농민운동 농민군의 주둔지로도 사용됐다.

통일신라 5소경으로 배치된 남원
통일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685년(신문왕 5) 9주5소경(九州五小京)을 이용해 확장된 영토의 지방행정 체계를 구성하였다. 수도였던 경주(금성)가 동남쪽으로 편중된 지리적 중심성을 보완하면서 통일신라의 다섯 개 소경들은 군사 및 이동거점에 배치됐다. 당시 통일신라의 5개 소경은 충주의 중원경(557년), 원주의 북원경(678년), 김해의 금관경(680년), 청주의 서원경(685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원의 남원경(685년)이었다.  통일신라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년)과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년) 시기에 주와 소경들의 경계와 방어를 위한 주성(州城)과 소경성(小京城)들이 조성됐다. 특히 문무왕의 시기에 조성된 성들은 주로 군사방어가 목적이었으며, 그 이후에 조성된 성들은 치소(緇素)의 보호가 목적이었다. 통일신라의 소경들은 중앙정부로부터 직접 통치되는 특별행정구역으로서 소경인과 소경주변의 촌락민들로 구성된 군부대를 갖고 있었다.
남원은 경주(금성)의 서쪽으로 약 170 km에 위치했으며, 당시 고구려 유민들이 거주하였다. 이에 따라 남원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아들 안승(安勝)과 고구려 유민들이 고구려의 독립을 위해 보덕국(報德國, 670-684년)의 건국활동의 거점이었다. 통일신라는 684년 보덕국을 해체시키며 유민들의 반란을 제압하고 남원소경을 설치하였다. 한편 신라의 귀족인 옥보고(玉寶高)가 남원에서 고구려의 거문고를 전수받기도 했다.
남원은 통일신라의 군사거점으로서 일찍부터 소경성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그 형태와 시점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통일신라 685년(신문왕 5)에 남원이 남원소경으로 지정됐고, 이후 691년(신문왕 11)에 남원소경성(南原小京城)이 조성되었다고 전해질뿐이다. 남원소경성은 당나라 무장인 유인궤(리우 젠쿠에이·劉仁軌, 602-685년)가 상주했었다는 기록이 있어 유인궤성(劉仁軌城)으로도 불린다. 통일신라는 이후 990년(동왕 9)에 남원소경을 남원성으로 개축하였다.
남원소경성은 북서쪽의 교룡산(蛟龍山)과 서쪽의 허산·기린산(麒麟山), 북쪽의 광대골산, 남쪽의 금암봉(金巖峰), 동쪽의 덕음산(德陰山)·덕음봉(德蔭峯)을 경계로 조성되었다. 특히 남원소경성은 동북에 광치천(광천), 그리고 동쪽에 요천을 두고 저습한 평지에 조성됐다. 교룡산성은 요천과 광치천(광천)과 연결되어 도시요새로서 남원을 보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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