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시간. 영등포에서 광명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운 좋게 뒤쪽에 자리 하나가 비어있었다. 앉고 보니, 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놀랐는데, 초중고를 함께 나온 동네 친구가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키가 컸고 한쪽 다리를 유난히 떨던 친구는 여전히 키가 크고 한쪽 다리를 떨었다. 나는 대화를 하는 내내 떠는 다리를 힐끔거렸다.
그즈음의 나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회사생활에 궁금한 것이 많았던 터라 친구의 직장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게 되었다. 친구는 흔하게 입에 오르내리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고, 스스로 돈을 많이 번다고 이야기 할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 나는 남자의 육아 휴직이며 회사의 복지에 대해서도 물어봤는데 친구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런 이야기를 건넸다.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 신입들에게 누가 말하더라.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싶은 사람은 줄 서 있다. 너희는 그런 수많은 사람들 중에 뽑힌 거다. 그러니 열심히 일해 달라.”
어느 회사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였지만, 친구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뽑혔다는 것은 자신이 그 중에 가장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대체할 인원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든 대체가 가능한 인간, 이라고 말하는 친구의 말투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회사에 들어갔다는 자부(만)심도, 실력이 모자라지만 운이 좋았다는 식의 겸손함도 아니었다. 친구의 말투에는 색깔이 없었다. 그런 친구에게 복지니 육아휴직이니 운운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색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한 것이 부끄러웠다. 색깔이 없는 말투에는 어떤 색의 말도 부끄럽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그 뭔가는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너무 크거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무 작아 실체가 없다. 그것은 말 그대로 너무 커서 모두를 자신의 내장 안에 붙들고 있는 괴물이거나, 너무 작아서 모두에게 기생하는 바이러스 같은 것이어서, 그런 괴물이나 바이러스의 입장에 서면 모든 인간‘들’은 무기력한 먹잇감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스스로 대체 가능한 인간이라고 말할 때의 친구는,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뭔가의 관점으로 말한 거다. 그래서 뭔가의 관점이 아닌 나만의 관점을 가져야 해!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런 말 역시 부끄러워진다. 도대체 나만의 관점, 그런 것이 있나? 친구여.
친구와 나는 버스의 종점에서 내렸다. 매일 아침 친구는 기점이 되어버린 종점에서 버스를 탈 것이다. 종점이 기점이고 기점이 종점인 버스 정류장에서 매일 버스를 타고 내린다는 것은 지겨운 일이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출발점과 종착점이 똑같은 삶. 이번 생은 유난히도 지겹다, 친구여. 우리의 청춘은 시작도 전에 이미 늙어버렸는데, 왜 너는 어렸을 때처럼 다리를 떨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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