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국 시인.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의 시인 비스바와 쉼보르스카는 ‘20세기의 마지막 문턱에서’라는 시 속에 이렇게 썼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질문보다 더 절박한 질문은 없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도 여전히 이 질문은 절박하다. 하지만 2015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이 질문은 우리에게 가장 아픈 질문인 동시에 잊은 질문이 되었다. 비단 세월호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러 측면에서 아노미적 상황을 살아가고 있다. 현재 우리는 “편안한 삶을 위해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또는 “정규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같은 기능적인 질문만이 절실해 보인다. 자본주의 경제논리만 무성할 뿐 삶과 사회에 대한 윤리적 성찰은 보이지 않는다.
같은 시에서 쉼보르스카는 이렇게 쓴다. “그러나 선함과 강함은 여전히 공존하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독하지 못하고, 독한 사람은 선하지 못하다.” 현재 우리 사회는 독하게만 사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잘 살기 위해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윤리적 성찰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만 팽배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쩌면 대답은 시인의 시에 숨겨져 있다. “독하게 살면서도 선하게 사는 것”이다. “독하다”는 말의 함의를 단순화시켜 해석해도 된다. 자신의 삶을 위해 독하게 노력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면서 어려운 이웃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무량심을 생각해 보자. 사무량심은 자, 비, 희, 사의 네 가지 마음이다. 한량없는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 한량없는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려는 마음, 한량없는 중생이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얻으면 기뻐하는 마음, 한량없는 중생을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이다.
잘 살기 위해서는 독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어쩌면 현실논리에 부합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우리는 사무량심을 기억하도록 하자. ‘한량없는 중생’에 대한 사무량심이 아니어도 좋다. 내 이웃에 대해 가지는 사무량심이면 족할 것이다. 선한 의지라는 것은 간단한 것이다. 저마다 가진 능력을 발휘하면서도 차별을 차이로 만들지 않고, 낙차를 격차로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굳이 이 세계 전부를 불국토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 다만 내 주변 한 평만이라도 사무량심이 통하는 선한 나라로 만들려고 노력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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