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벚꽃이 만발했다. 꽃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학생들이 아리땁고, 퇴근하는 밤마다 검은 하늘 위로 뻗쳐오른 흰 꽃들이 아름답다. 살아있음을 문득 절감하게 된다. 이 아름다움이야말로 삶의 생동함과 의미가 온 몸을 통과해가는 순간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대학에는 아름다움과 희망보다는 갈등과 추문들이 서성거리고 있다. 작년 12월부터 벌써 넉달 째. 교수협의회는 이 위기를 벗어나는데 일조하기 위해 이런저런 발언을 해왔다. 조계종단과 동국대는 서로 긴밀하게 협조해야 할 관계이긴 하지만 엄연히 법적 독립성을 지닌 기관이라는 점, 그러니 총장 선임에도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점, 표절이 확정된 분이 총장이 된다면 어찌 학생들에게 표절하지 말라고 교육할 수 있겠느냐는 점 등이다. 그러나 대학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는 이런 요구들에 대해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최근에는 스님이사 다수에 대해 문화재 절취, 사기 및 횡령, 단란주점 딸린 모텔 운영, 간통 등 차마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설마 그 폭로가 사실일 리가 없겠으니 결백함을 해명하고 무책임한 폭로자를 고소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역시 대응은 침묵 뿐이다. 교수협의회의 주장은 사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는 상식일 뿐이다. 그러나 동악은 점차 상식을 말하거나 생각하는 일조차 힘들어지고 있다. ‘비상식’이 활개를 치고 ‘상식’은 침묵을 강요받는 분위기가 짙어지고 있다. 만해스님의 후학들이 어쩌다 이런 죽음의 침묵 속에 살게 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아름다운 침묵도 있다. 본관 옆 ‘만해 시비’에 선명히 새겨져있는 언어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님의 침묵’ 중에서)
만해스님의 말씀은 물론 불의에 침묵하라는 뜻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항일독립투사로서 그분의 삶 자체가 침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침묵하는 ‘님’은 과연 누구를 가리킴일까. 상식을 지키자는 많은 사람들의 요구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분? 강요된 침묵에 순응하는 분? 아니면 붓다의 가르침대로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는’, 침묵으로서도 전달되는 이심전심의 진리 그 자체? 우리는 어떤 침묵을 택할 것인가.
교수협의회는 전체교수 비상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이렇게 결의했다. "이 위기를 기회로 대반전시켜야 한다." 만해스님의 언어로 옮기자면 이렇게 될 것이다.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어야 한다.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할 때 저 흰 꽃들은 더욱 아름답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