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신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신국주 전 총장서리 ㆍ 윤청광 동문 인터뷰

동대신문이 창간 65주년이다. 해방직후부터 수많은 역사 현장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시대에 학생기자가 있었다. 당시 활동을 했던 선배기자들을 만나 본지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1947년 박종선, 정익용, 팽진호, 김용호 동문이 주축이 돼 타블로이드판형 4면으로 구성된 동국월보를 제작했다. 하지만 교수 22명에 대한 프로필과 게재된 일부 논문이 정치적으로 불순하다는 점이 지적돼 배부되지도 못한 채 압수당했다.
1950년 4월 15일 대판 4면으로 구성된 동대신문이 세상에 나왔다. 당시 신문동호회소속이던 이외윤, 박래춘, 이종한, 오봉열, 신국주 동문 등은 세계 유명 대학들이 대학신문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전해 듣고 세계 대학 수준을 따라가기 위해 학보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마음은 이미 신문을 제작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 신국주 동문은 “신문제작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20대 초반 학생이었다. 신문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며 그때 어려움을 토로했다.
신문동호회 동문들은 당시 서울신문 사장을 겸직하고 있던 오봉열 동문의 아버지, 오종식 교수의 도움으로 신문제작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오 동문 집에 약 6개월간 기거 하며 다른 나라 대학신문 수준과 내용 등을 조사하며 사전준비를 했다.
신 동문은 “서울신문 편집실에 들어가 현직 기자들에게 배우는 입장에서 신문을 만들었다”며 오종식 교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창간호는 언론으로서 역할 뿐만 아니라 당시 교수와 학생 논문을 싣는 학술지 성격도 있었다.
60년대는 사회적 풍파가 많은 시대였다. 1960년 4월 문학가가 꿈인 한 청년은 ‘동대신문 수습기자 모집’ 게시글을 우연히 보게 됐다. 그는 단 4명을 뽑는 시험에 26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윤청광 동문은 “월급이 나오고 글쓰기 연습도 될 것 같아 지원했다”며 지원 당시를 회상했다.
윤청광 동문이 학생기자가 되고 일주일 뒤 4.19혁명이 일어났다. 그는 “당시 취재를 하러갔는데 취재가 아니라 같이 시위를 한 것 같다”고 말했다. 4.19혁명 이후 계엄령이 선포됐고 학교 운동장에는 군인들이 진주해 있었다. 신문 배부 전 군인들의 검열을 받아야했다. 윤 동문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 “회전무대에 남산 ‘고지’라는 표현을 써 우리대학에 군인이 진주해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알리고자 노력한 기억이 있다”며 웃었다.
많은 풍파를 거쳐 현재로 온 동대신문, 그 역할이 무엇인지 두 동문에게 물어봤다. 신국주 동문은 대학신문이란 “학생 여론을 대변하는 여론의 장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덧붙여 편집자율권 보장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신 동문은 연구, 교육에 대한 정보와 훌륭한 논문들을 소개하는 학술지 역할도 충실히 병행해 애교심을 함양시키는 대학신문이 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윤청광 동문은 “사회 부조리를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싱크홀이라 표현하고 싶다. 언론이란 싱크홀이 사람들을 집어 삼키기 전 주위에게 알리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신문이 학생, 교수, 교직원, 동문 등 모두를 위한 소통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윤 동문은 “이러한 대화가 결국 싱크홀을 없앨 수 있는 재료가 된다”고 강조했다.
학생기자로 활동한지 50~60여년이 지났지만 그들은 여전히 동대신문 애독자다. 두 동문은 입을 모아 “꾸준히 학교소식을 알리고 모교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도록 훌륭한 동문들을 알렸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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