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운하가 초래할 생명·문화적 손실 복구 어려워

우리가 살려고 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것들은 살려는 의지가 있다. 물 속에서 약동하는 물고기처럼 허공 속을 나는 솔개처럼 숨 쉬는 것들은 모두 살고자 한다. 한 생명체가 숨을 들이 마시고 내쉬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현상은 없다. 이처럼 숨을 마시고 내뱉는 행위는 ‘꽃이 피고’, ‘물이 흐르는’ 것처럼 생명체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는 ‘호흡’과 ‘의식’과 ‘체온’ 세 가지의 화합에 의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불교는 수행의 과보로 성취한 보신의 입장과 달리 진리의 몸인 법신의 입장에서는 유정과 무정을 구분하지 않는다. 때문에 담장과 벽과 기와와 돌에 대해서도 그 변화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언젠가는 성불한다고 해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법신의 입장에 서게 되면 문화재도 생명체와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존재로 이해하게 한다.

문화재는 문화 활동의 소산이자 문화적 가치를 지닌 것을 일컫는다. 때문에 문화재 속에는 그 시대의 삶의 태도와 삶의 방식이 투영되어 있다. 우리나라 문화재에는 유형 및 무형 문화재, 민속자료,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 문화재의 7할 이상은 우리 민족의 꿈과 이상과 정신을 머금고 있는 불교문화재로 집계되고 있다. 이 때문에 불교는 민족문화의 보고로 인정받고 있다.

현 정부가 대통령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한반도 대운하’ 건설안이 다시 이슈가 되고 있다. 워낙은 ‘경부운하’에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기간에 직면하여 ‘호남운하’와 ‘충청운하’에다가 ‘북한’까지 수로를 잇는 운하에 대한 구상까지 덧붙여지면서 ‘한반도 대운하’라는 명칭으로 확장되었다.

운하에 휩쓸릴 생명들

주목할 것은 강가에 자리 잡은 절과 탑 등을 지키기 위해 불교계가 운하 건설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석존의 연기사상은 존재를 실체가 아니라 관계로 파악하여 생명과 생명체들의 존귀함을 갈파해 주고 있다. 해서 불교계가 희원하는 것 역시 산과 강에 함께 살고 있는 생명의 중요성을 먼저 제고시키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강 주변에 산재해 있는 생명과 생명체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한다.

강과 산이 모든 문명의 터전이듯이 우리나라의 강과 산은 우리 민족 문화의 모체가 된다. 우리 조상들의 숨결과 역사가 숨 쉬는 문화재 역시 이러한 한반도의 자연 생태 환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때문에 문화재 속에는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과 ‘열’과 ‘성’ 및 ‘혼’과 ‘얼’이 배어있다. 그리고 그 가치는 생명의 가치와 다르지 않다. 나라와 스승, 부모와 자식의 가치를 계량할 수 없는 것처럼 산과 강 유역의 생명과 문화는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강은 인간의 심연을 연상하는 공간이며 산은 인간의 사색을 지속하는 공간이다. 인간은 산과 강을 오고 가며 호모 사피엔스의 지혜를 빚어낼 수 있었다. 해서 호모 사피엔스가 빚어낸 문화재는 이 땅의 물과 흙과 돌과 나무 등으로 빚어낸 새로운 생명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대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빛을 발하는 생명체인 것이다. 나아가 그것은 이 땅 사람들의 정신사가 투영된 생명 그 자체인 것이다.

‘자타카’의 ‘사신’(捨身)설화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사냥꾼 앞에서 쫓겨온 ‘비둘기’와 숨겨준 ‘사람’의 가치는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나 그 일부를 타인에게 주는 ‘토끼이야기’나 ‘지비왕 이야기’에서처럼 불교 경전은 타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보살의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가치까지 제시하고 있다.

대운하 정책이 지향할 길

현 정부는 청계천을 덮고 있던 뚜껑을 열고 물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한반도 운하안’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여당은 표를 의식해 4월 9일 총선에서는 ‘한반도 대운하’ 건설 공약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정부와 여당은 예기치 않았던 미국산 쇠고기 파동에 직면하여 운하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호흡 조절을 하며 운하안을 가다듬고 있다. 나아가 대운하 건설안의 국민적 반대를 넘어서기 위해 ‘4대 강 정비’와 ‘수질 개선’ 및 ‘뱃길 복원’으로 ‘대운하’의 이름까지 바꾸었다.

조정안에서는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조령 터널과 팔당 상수원 구간을 뒤로 미루되, 자치단체가 원하고 반대 여론이 적은 낙동강(문경-부산), 영산강(목포-광주), 경인운하는 우선 추진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이를 위하여 준설과 하상정비, 수질개선, 하천 주변 환경 개선 등 사업에 ‘4대 강 수질 보전 특별 예산’(2015년까지 15조~20조원)을 투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운하 터미널 건설 및 관광물류단지 조성산업 등은 당초 계획대로 민자(民資)로 유치해 추진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원래 안에서 상당히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반도 서남부를 잇는 한반도 대운하를 4대 강 유역별로 나눈다는 것일 뿐 ‘물길을 잇는다’는 기본 안은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여기에는 4대 강 유역별로 이어놓은 물길을 하나로 잇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는 전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지역의 강과 산 등지에 자리해 있는 문화유산의 가치와 정책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다.

불교계가 운하 건설안에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운하 건설 지역의 산과 강 유역에 자리해 있는 생명체들의 인정과 배려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타의 생명체들과 동등한 자격과 지위를 지니고 있는 문화 생명체들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정책이 먼저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생명과 생명체들이 온전히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체가 없으면 문화도 없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로 불린다. 문화는 어제의 죽은 고목이 아니라 지금도 새싹을 틔우는 유기체이다. 그리고 문화유산은 현재의 문화적 가치와 미래의 문화적 비젼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때문에 해당 문화재가 한 분야의 정신사를 고스란히 온축해 오고 있다는 의미를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문화재라는 흔적과 기록을 통해 과거를 재구하고 현재를 영위하며 미래를 설계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직선적으로 발전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늘날의 과학 기술로도 125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경주 토함산 석불사(석굴암)의 원형을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언어적 존재이자 의식 내적 존재이며 마음의 시간인 불교의 시간관은 이러한 사실을 환기시켜 주고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내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인식과 미래의 예지는 내가 점을 찍는 순간 가늠되기 때문이다.

불교계가 단지 산과 강 유역에 흩어져 있는 절과 탑 등을 지키기 위해 운하 건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강과 산 주변에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는 생명체들의 살려는 의지를 존중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 환경들 스스로가 만들어내고 있는 자기 정화능력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 생태 환경 스스로가 자신들의 정화 능력에 의해 맑은 물과 공기와 바람 등을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을 잇는 경기 운하 건설 지역인 서울의 봉은사와 여주의 신륵사 및 충주의 미륵세계사, 낙동강을 잇는 경부 운하 지역은 상주 남장사와 문경의 봉암사 및 밀양의 표충사, 금강을 잇는 충청 운하와 영산강을 잇는 호남 운하 주변의 사찰과 불탑들의 보호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지역 주변에 사는 생명체들의 존중과 건강이다. 이 지역 불교문화재들이 지니고 있는 민족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이들 생명체들의 지위를 인정하는 지평에서 자연스럽게 인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 영 섭 
불교대학 불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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