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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13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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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광야 교수의 한국의 도시 <3> 안개가 찾아오는 도시, 순천 ①안개 끼는 모래펄, 해상 무역의 거점으로

   
▲ 순천 남쪽 바다의 갈대밭과 갯벌은 남쪽의 적금도까지를 원형의 순천만으로 완성시킨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김승옥은 소설 ‘무진기행’의 배경 도시 ‘무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안개 덕분에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무진은 사실 순천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가상도시다.

‘무진’이 된 안개 도시
계족산에서 시작해 분지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약 10km, 갯벌의 순천만ㆍ여자만으로 흘러가는 동천(東川)의 입장에서 보면 순천은 길고 넓은 들이다. 동천은 먼저 석현천과 만나 순천의 시작점이 되며 옥천(玉川)을 만나 순천의 중심부가 된다. 또한 남쪽의 이사천(伊沙川)의 범람지에는 평야를 조성했다. 순천 남쪽 바다의 갈대밭과 갯벌은 남쪽의 적금도(積金島)까지를 원형의 순천만으로 완성시킨다. 이런 지리적 특성은 순천을 깊은 안개가 끼는 분지의 모래펄로 만들었다. 때문에 순천은 그 특성에 맞게 모래드리, 사평(沙平), 승평(昇平), 그리고 평양(平陽)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한편, 만조 시 폭우가 내려 동천이 범람하면 순천에는 큰 홍수가 일었다. 이처럼 순천은 라인강 하구 네덜란드의 도시들, 그리고 미시시피 강 하구의 뉴올리언스처럼 범람원에서 수마를 겪으며 성장해온 도시이기도 하다.
이러한 물리적 지형 때문에 순천은 한반도의 내륙으로부터 육상접근이 매우 제한되어 왔으며, 독립된 호남의 동남지역권을 조성해 온 독특한 도시이다.
순천은 이미 조선 영조 때 인구 4만 1천 명의 큰 지역거점을 이루었으며, 일제강점기의 1920년대 말에는 인구 10만 명의 도시였다.  지금도 순천은 성읍시장(중앙시장), 웃장, 아랫장, 역전시장 등이 경쟁하며 성장하는 농수산물 집산지이다.

백제의 활동 거점
순천은 구석기·청동기시대의 초기거주지와 고인돌들이 남아있는 역사적인 도시이다. 이 유적들은 보성강, 이사천, 동천의 주변과 순천만 주변에서 발견됐다. 당시 순천은 마한(馬韓)에 속했으며, 특히 낙안과 벌교 지역은 마한의 소국들 중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또는 신분활국(臣濆活國)의 영토였다.
이후 백제의 활동 거점이 된 순천은 감평군 또는 사평군ㆍ무평군이라 불렸으며, 송광면과 주암면 구산리 등 보성강의 충적평지와 구릉에 주거유적들을 남겼다. 또한 이곳을 방어하는 산성들이 동서남북 방향에 순차적으로 조성됐다. 이후 통일신라 757년(경덕왕 16)에는 백제의 감평군이 승평군ㆍ승주군으로 개명되었다. 이후 고려의 건국에 기여한 후삼국시대의 후백제는 해룡산성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백제의 해룡산성은 해룡산 구릉변의 주거지와 동천 동남쪽에 조성된 대대포구를 방어하는 곳이었다.  당시 대대포구는 순천만을 통한 백제의 해상무역 거점이었으며, 신라말-고려초의 지방호족 박영규의 지배거점이기도 했다.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였으며 순천만의 대대포구를 통해 해상무역으로 성장한 후백제의 유력자였다. 하지만 고려 성종 이후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되고 지방통제가 강화되면서 이곳의 자유로운 해상활동은 규제되고 말았다. 한편 이 포구는 이사천과 동천의 토사들이 퇴적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으며, 1375년을 전후로 급증한 왜군 침입이 쇠퇴를 가속시켰다.

   
▲ 해동지도에서 본 순천읍성.
순천부읍성의 건립
조선시대 순천은 평양(平陽)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1413년(태종 13)에는 군현제에 근거한 지방행정의 개편으로 순천도호부(順天都護府)로 승격되기도 했다.
하지만 남해-여수의 해상방어가 중요해진 1479년(성종 10)을 전후로 순천도호부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으로 확대된 뒤 여수현(麗水縣)에 이전되어 설치되었다.
이 때의 순천은 순천부읍성(順天府邑城)으로 정의할 수 있다. 순천부읍성은1430년(세종 12), 동천으로부터 서쪽으로 300m떨어진 내륙입지에 조성되었다. 물론 순천부읍성은 고려 승주목의 성곽을 이용해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심성벽에는 네 개의 성문과 네 개의 옹성이 조성되었고, 특히 북쪽 성벽에는 길이가 1,730m(3,701척)인 해자가 조성되었다. 
순천부읍성의 동문은 현재 성동오거리에서 서쪽으로 60m 떨어진 곳에 위치했으며 구례, 광양, 여수과 연결되는 중심 진입부였다. 남문은 현재 남문교에서 북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입지해 해남으로 연결되었고, 네 개의 성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2층 다리인 연자루와 함께 만들어졌다. 한편 북문은 의료원 앞 사거리, 서문은 금곡길과 서문성터길이 만나는 사거리에 위치했다.
한편 순천부읍성의 외부에는 조선시대의 제사처인 사직단(社稷壇), 여단(祣壇), 문묘(文廟), 성황단(城隍壇)이 있었다. 먼저 사직단은 순천부읍성의 서쪽에 입지했으며, 봄과 가을에 지신과 곡물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 여러신을 모시는 여단은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가 해룡산신이 되었다는 해룡산사(海龍山祀)에 입지했으며, 자손이 없거나 주인이 없는 무리신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 순천을 보호하는 산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던 성황단은 생목동 봉화산에 조성되었으며, 공자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문묘는 금곡동 순천향교에 조성되었다.  
공과대학 건축공학부
ghan@dgu.edu

한광야  건축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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