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성중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2
‘인간적’이라는 말은 언제나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실 ‘인간적’이란 말, 다시 말해 사람다운 모습이란 확실히 정의내릴 수 없는 추상적인 단어다. 누군가가 “무엇이 사람다운 모습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으로나 궁극적으로나 ‘인간적’이라는 단어가 긍정적인 뜻을 지닌다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인간적’이란 말이 화려한 느낌은 아니다. 꽤나 일상적이고 때로는 애잔함이 느껴지는 단어다. ‘인간적’이란 단어를 조금이나마 확실한 뜻으로 느끼려고 한다면, 그 답은 사람을 의미하는 한자 ‘사람 인(人)’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한자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댄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 글자를 보면 추상적이었던 ‘인간적’이란 단어의 의미가 조금은 더 가깝게 다가온다. 서로에게 기댄 모습에서 ‘인간적’인 느낌이 다가온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1월 20일은 용산참사가 발생한 날이었다. 6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안타까운 사건은 재개발의 의미를 다시 되돌아보게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했다. 재개발이 줄 경제적 이익에 대한 전망은 인간 본연의 가치를 압도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감수해서라도 경제적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용산 개발은 중단되어버렸고, 결과적으로 어떠한 이득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평택 쌍용차 공장에서도 경제적 이익은 인간보다 중요했다. 쌍용자동차는 약 천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을 해고했고, 이는 어떤 정당한 논리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장에 모여 해고의 부당함을 외친 해고노동자자들이 설 자리는 이 사회에 없었다. 그리고 지난 2014년 대법원은 쌍용 자동차 회사 측이 결정한 대량 해고는 정당하다는 판결로 그들을 다시 70미터 굴뚝 위로 내몰았다.
6년이 지난 지금, 용산 참사와 쌍용자동차 해고 두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어떠한 ‘인간적’인 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적어도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라면 저런 ‘비인간적’인 모습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을 한순간에 배제시키는 일은 결코 ‘인간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너무나 쉽게 그들을 배제시켰다. 용산 참사의 주요 원인이었던 경찰의 무리한 진압은 별다른 여론의 저항 없이 진행됐고, 결과에 대한 확실한 비판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정권이 이런 상황 속에서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에 대한 진압 작전을 무리하게 진행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그마저도 우리 사회는 외면해버렸고 결국 어떠한 비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눈을 감고 서로를 외면해왔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 ‘공생’이라는 대원칙은 절대 깨뜨릴 수 없는 순리다. 인간 사회가 지금까지 유지되어왔고, 과거에 비해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올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이 함께 사회를 이룩해 공생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같이 살아가기에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다. 그리고 같이 있기에 행복을 느끼고 때론 슬픔을 같이 나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우리 사회는 함께 살 줄 아는 그런 보다 ‘인간적’인 인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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