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때 우리대학을 졸업한 국어선생님을 만나 그 분의 포로가 되어 버린 나는 소설가가 되겠다고 맹세했다. 그런 나에게 문학의 전당 우리대학 국문학과는 대안 없는 선택이었다.
합격증을 받은 나는 “유명한 이병주 소설가의 제자가 된다”는 생각에 밤잠을 이룰 수 가 없었다. 백발에 뿔테 안경을 쓴 소설가가 명진관 강단에 나타나리라고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병주 선생님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마가 톡 튀어나오고 새카만 눈에서 광채를 뿜는, 그런 분이었다. 엥?
나중에 알았지만 내가 생각한 이병주 선생님은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쓴, 한자로 ‘李炳注(이병주)’라고 쓰는 분이었다. 나는 그분이 쓴 일간신문 연재소설을 매일 읽었다. 동악에서 만난 어른은 ‘李丙疇(이병주)’라는, 두시연구(杜詩?究;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연구하는 학문)의 대가이셨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내가 이 이야기를 하자 소설 ‘황색인’을 쓴 이상문 선배가 배를 잡고 웃었다. “어린놈이 한자를 너무 많이 알았구나. 석전(石田; 이병주 선생님의 호) 선생님의 한문 함자를 읽기 어려운데 용하다.”
이런 사연을 가지고 만난 스승은 제자에게 축복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입학하기도 전에 부르셔서 무애(无涯) 선생님의 묘소로 데려가셨다. 제자의 예를 갖추게 하신 것이다. 다산 초당으로 이끄시어 고전의 향내를 맛보이셨다. 입학한 뒤에도 순례는 그치지 않았다. 봄날 오후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허난설헌(許蘭雪軒; 조선 중기 여성시인)의 묘를 답사한 기억이 새롭다. 나는 이때 선생님의 명으로 짧은 논문을 썼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이 글을 ‘동대신문’에 싣게 해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고전을 공부하기를 기대하셨던 듯하다. 하지만 나는 소설 외에 어떤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니 스승과 제자의 꿈은 엇갈릴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답사 길에 선생님 뒤를 따라 걸으며 들은 말씀이 기억난다. 몰락한 댁 묘에 좋은 비석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세도가가 마름을 보내 쪼개 가려 했다. 문중이 길길이 뛰는데 그 댁 어린 선비가 “비면만 깎아 남기고 다 가져가라” 했다. “그래야 도로 가져다 쓴다”며.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안목과 담대함을 원하셨다. 가끔 영화 ‘넘버 3’에 나오는 송강호처럼 말씀하셨다. “선비는 관에 못질할 때까지 공부한다”, “누가 뭐라던 그냥 쓰윽 가는 거야” 식이었다. 제자들은 이 말투를 자주 흉내 냈다.
이 계절이 오면 늘 선생님을 생각한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를 굽어보시며 “아들 많은 집은 아무리 가난해도 업신여기지 못 한다” 하셨다. 돌아보거니와, 우리는 어떤 아들들로 장성했는가. 동악의 어린 아들들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으면 겨우 책임을 면할까. 유구한 세월 남산 위의 저 소나무처럼 바람서리 불변한 전당에서 새로이 만나는 거룩한 인연들, 동악의 아들들에게 부처님의 가피가 충만하기를 소원한다.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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