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시오 해류가 이끈 문명의 만남, 그리고 헤어짐의 여로

-해류가 만나는 도시, 여수(1)

한광야 교수의 ‘한국의 도시’는 우리가 잘 모르는 한국 도시들의 이면을 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익히 알려진 관광명소들이 아닌, 조상들의 삶이 담긴 옛 도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자 합니다. 그 시작은 문화와 상업 교류의 중심지였던 도시, 전라남도 동남부에 위치한 여수입니다.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노래 ‘여수 밤바다’가 크게 히트 친 이후, 여수를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는지 모르겠다. 곧 이어 개최된 ‘여수 엑스포’ 역시 여수를 찾아오는 발길을 늘리는 데 한 몫 했을 것이다. 어찌됐든 오늘날의 여수는 노랫말처럼 아름다운 얘기가 있는, 알 수 없는 향기가 있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걷고 싶은 바다가 있는 도시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에게 특별한 여수는 사실 멀리서 찾아오는 해류의 항구이며 그 갈림목이다. 동남아시아, 타이완의 바다로부터 강력한 속도로 올라오는 따뜻한 쿠로시오 해류(Kuroshio Currentㆍ?潮)는 여수를 부동항으로 만들고 일본의 키타 큐슈(北九州ㆍKita Kyushu)로 향하는 쓰시마 해류(Tsushima Currentㆍ對馬海流)와 동해로 올라가는 동한난류로 나뉘어 흘러나간다.

쿠로시오 해류, 세계를 만나게 하다

한반도가 유럽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흥미롭게도 이 쿠로시오 해류 때문이다. 하멜표류기의 저자인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1630-1692)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의 회계직원이었다. 그는 1653년 스페르베르(De Sperwer) 상선으로 당시 네덜란드 영토였던 포마사(Formosa, 1624~1662, 현재 타이완)를 출발해 쿠로시오 해류를 따라 나가사키(長崎ㆍNagasaki)로 항해하였다. 

하지만 하멜의 배는 난파되었고 제주도에 표착하고 말았다. 하멜과 생존한 35명의 일행들은 곧 해남을 거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조선에서의 마지막 체류시기에 그는 여수(당시 종고산 남쪽사면에 조성된 전라좌수영성이며 ‘SaesOng’으로 표기)로 압송되어 노역을 하게 된다. 

이후 하멜은 1666년 7명의 선원들과 함께 여수를 탈출, 나가사키에 도착하였으며 네덜란드인 거주지인 데지마(出島 Dejima)에서 잠시 머물렀다. 하멜은 데지마에서 다음해 네덜란드로 귀향하기 전까지, 13년 동안의 조선생활과 조선문화를 기록한 보고서 ‘제주해안에 난파된 네덜란드 상선(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andois sur la Coste de l'isle de Quelpaerts)’을 작성하였다.  이후 이 보고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하멜의 일기와 코리아 왕국의 설명(Hamel's Journal and a 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Korea, 1653-1666)’으로 출간되기에 이른다.

문화전파와 상업교역의 거점, 여수

오랜 옛날, 여수는 과연 한반도에서 어떠한 곳이었을까? 여수는 이미 BC 4세기 전후부터 이 쿠로시오 해류를 이용해 중국의 동해안, 한반도의 서·남해안, 그리고 일본의 키타 큐슈와 혼슈(本州 Honshu) 지역들을 연결하는 문화전파와 상업교역의 중간거점이었다.  물론 이러한 지리적 이유로 여수는 고려말기부터 일본 왜구가 한반도로 침략해오는 진입부가 되기도 했다.

여수의 대중국-대일본 해상교역의 거점기능은 마한의 일부였던 원지국(爰池國, ?~BC 4세기)과 가야국(伽倻國, BC 1세기~562)때부터 시작됐다. 여천의 화장동 선사유적지는 여수가 이러한 국제적인 교역장소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가야(42~562) 시대의 여수는 중국의 진조(晉朝ㆍJin Dynasty, 265~420)와 남북조(南北朝ㆍSouthern and Northern Dynasties, 420~589) 시대에 북부 산동반도의 무역항이었던 덩저우(鄧州ㆍDengzhou, 현재 얀타이(煙臺ㆍYantai))와 남부의 지안강(建康 Jiankang, 현재 난징(南京ㆍNanjing)), 그리고 일본의 아스카(飛鳥ㆍAsuka)와 나라(奈良ㆍNara, 헤이조쿄(平城京ㆍHeijokyo))를 연결해주었다.

여수, 중국과 일본으로 뻗어가다

백제와 통일신라의 여수는 서해안의 당항성(黨項城, 현재 화성의 남양)의 당은포(唐恩浦)를 통해, 중국 당조(唐朝ㆍTang Dynasty, 618~907) 시대의 산동반도 덩저우, 웨이하이(威海ㆍWeihai), 칭다오(靑島ㆍQingdao)로 연결되었다. 특히 당항성은 661년 의상(義湘, 625-702)이 문무왕의 외교사신단을 따라 장안(長安ㆍChang'an, 현재 시안(西安ㆍXi’an))으로 유학을 떠났던 항구이기도 하다.

한편 일본의 첫번째 세습왕(monarch)인 덴무 테노(天武天皇ㆍTenmu-Tenno, 631-686)는 당조로부터 문명수입과 외교교섭을 위한 견당사(遣唐使)의 해로로서 630~665년 전후로 한반도의 남·서해안을 이용하였다. 당시 일본의 대중국 해로는 ‘오와다 노 토마리(大輪田泊ㆍ?wada no Tomari, 이후 효고추(兵庫津ㆍHy?go-Tsu)와 고베(神?ㆍKobe)와 오사카(大阪ㆍOsaka)로부터 시작되어 세토 나이카이(???海ㆍSeto Naikai Inland Sea)-하카타(博多ㆍHakata, 현재 후쿠오카(福岡ㆍFukuoka))-쓰시마-여수·남해안-서해안-덩저우’로 연결되었다.

고려(918-1392년)의 여수는 중국 송조(宋朝ㆍSong Dynasty, 960~1279) 시대에 흑산도를 포함한 신안의 섬들을 통해서 양쯔강(揚子江ㆍ長江) 남쪽의 경제중심부인 양저우(揚州ㆍYangzhou), 남동부 해안의 ‘물고기와 쌀의 고장(魚米之鄕)’인 제쟝셍(浙江省)과 그 비단교역의 거점항구인 밍저우(明州ㆍMingzhou, 청조의 닝보(寧波ㆍNingbo), 남송조(南宋ㆍSouthern Song Dynasty, 1127~1279)의 수도인 린안(臨安ㆍLin'an, 현재 항조우(杭州ㆍHangzhou))의 바다 항구였던 타이저우(台州ㆍTaizhou, 당조의 하이저우(海州ㆍHaizhou))와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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