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詩(시)
 
感傷(감상)·悔恨(회한)의 言語(언어)로 忍苦(인고)의 結實(결실)…詩(시)의 供給源(공급원)
퉁가면 울릴 듯한 가을의 푸르름엔 바윗돌도 모다 바스러져 내리는데 <<徐廷柱(서정주)의 ‘木花(목화)’에서>>
 
章湖(장호) (文理大(문리대)강사·詩人(시인))
 
 나들이 갔던 정신이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오는 가을이란 季節(계절)은, 그만큼 詩(시)의 중요한 供給源(공급원)이기도하다. 그것은 혹은, 感傷(감상)에서 출발하여 뼈를 깎는 悔恨(회한)의 言語(언어)로 나타나기도 하며, 혹은 또 結實(결실)의 快樂(쾌락)에서 내면의 풍요와 圓熟(원숙)의 境地(경지)를 전해주기도 한다. 古典的(고전적)인 쟝·드·라·폰테느의 宦話詩(환화시)는 바로 그 두 개의 類型(유형)을 티피컬하게 보여준다. 매미는 기나긴 여름을 노래하며 살았으니 하늬바람 차와지자 덧없어져버렸다. 파리대가리, 땅벌레의 조각도 찾을 길 없어라. 배고픔을 참지 못해 이웃 사는 개미집에 가서 부탁입니다. 오는 시절까지 먹고 남을 양식일랑 좀 꿔 주십시오, 사정하였다. 명년 8월까지는 어김없고말고요. 元金(원금) 利子(이자) 합해서 갚아올리리이다. 벌레의 맹세에 一口二言(일구이언) 없습니다. 그렇다고 개미 쉬이 빌려주는가 그것은 개미의 수치스런 일이다. 그대는 더울 때 뭘 하셨소? 개미가 매미더러 묻는 말이다. 밤낮을 가리잖고 누구에게나 노래를 들려주었지요. 달리 생각마십시오. 노랠 불렀다고 좋은 일을 했군. 그렇거든 이번엔 춤이나 추시지. (LA CIGALE ET LA FOURMY) 말할 것도 없이 여기 매미의 가을은 悔恨(회한)의 季節(계절)이요. 結實(결실)과 豊足(풍족)의 喜悅(희열)은 개미의 가을일씨 분명하다. 라·폰테느 자신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재산도 없이 남의 食客(식객)으로 평생을 보냈으니, 개미아닌 매미였다. 古典的(고전적)인 格調(격조)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것이 여실하게 들어나는 情感(정감)은 詩人(시인)에 따라 다르다. 人生(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中略(중략))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매어 우는데.
 
(木馬(목마)와 淑女(숙녀))
 
夭折(요절)한 朴寅煥(박인환)은 鳴咽(명인)로 가을을 맞이했다. 외상값을 조르면 <잎이 피기전에는 갚지요>했으나 끝내 그것은 못 갚았다. 지난 봄 病苦(병고)로 간 金洙敦(김수돈)의 <가을>도 痛恨(통한)이다. 청춘은 사람마다 지니는 것인데 어찌하여 지난 밤은 미치도록 술을 마시고 구두 한쪽을 어디에다 두고 왔는지 도무지 기억마저 희미한 것이다. 가을! (中略(중략)) 愛人(애인)의 육체처럼 짙은 취향 있는 鄕愁(향수) 술 깨어 새별 홀로 우는 뉘우침이여! 두사람이 모두 壽(수)를 다 하지못한 時代(시대)를 앓은 是認(시인)이었거니와 이런 發想(발상)의 上流(상류)로는 象徵主義(상징주의)의 酒神(주신)이었던 폴·베르레느의 <가을의 노래> (Chansond, Automne)에 더 뚜렷하고 또 悔恨(회한)을 사랑의 咀呪(저주)에까지 비약시켜 가을의 安息(안식)에 이르게 한것으로는 알프랫드·드·뭇세의 <十月(시월)의 밤> (LA NUITD.OCTOBER) 이었다.
詩人(시인)ㅣ일찌기 나에게 背信(배신)을 가르치고 恐怖(공포)와 憤怒(분노)에 이성을 잃게 한 너에게 汚辱(오욕) 있으라!
不吉(불길)한 사랑으로 나의 청춘과 나의 아름다운 나날을 암흑 속에 파묻은 검은 눈알의 계집 너에게 汚辱(오욕) 있으라!
詩神(시신)ㅣ울어라 詩人(시인)이여!
보리는 익기 위하여 이슬을 要(요)하고 사람은 살고 느끼기 위하여 눈물을 要(요)하노라.
詩人(시인)ㅣ내 만일 사람의 눈물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의 울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서럽고려 나의 勞作(노작)의 날이여
나의 산 보람있던 날이여!
詩神(시신)ㅣ사람은 弟子(제자)요 悲哀(비애)는 그 스승 울어라 울어라 詩人(시인)이여!
言言句句(언언구구) 아름다움으로 차있는 이 詩(시)는 저 浪漫派(낭만파)의 男裝閨秀(남장규수) 죨쥬·쌍드와의 사랑에 배반당한 뮷세의 가을이다.
이런 悔恨(회한)은 사실 ‘술 깨어보는 하나의 達觀(달관)’이 앞선다.
W·H·오유든의 <一九三九年九月一日(1939년 9월 1일>의 三節末行(삼절말행)에 <We must suffer them all again>은 時代(시대)에 대해서 詩人(시인)이 가을에 느끼는 자세라면 人生(인생)에 대해서는 年前(연전) 作故(작고)한 로버트·프로스트의 것이 더 觀照的(관조적)이다.
숲 속에 있는 두 갈래 길 중, 한쪽을 버리고 다른 한쪽을 택해 간 것, 그것이 어쩌면 내 人生에 모든 차이를 가져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觀照(관조)는 분명히 하나의 哲學(철학)이다.
그것은 폴·봐레리의 <海邊(해변)의 墓地(묘지)> (LECIMETIRE MARIN) 第(제)1節(절)에 나오는, 저유명한 詩句(시구) <LA MER, LA MER TOUJOURS RECOMMENCAIS!>에 통한다.
情感(정감)을 想念(상념)으로 가라앉히면 가을의 詩(시)도 맑아진다. 아침저녁 살갗에 묻는 요즈막의 향깃한 차거움… 四十(사십)을 아직도 溫血動物(온혈동물)인데 오늘은 먼 하늘빛 넥타일 매어볼까
 
金顯承(김현승) -晴天(청천)-
 
이런 이미지는 모더니스트 趙鄕(조향)에게서 깨끗한 쌤골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序頭(서두)에 古歌(고가) 秋風感別高曲(추풍 감별곡)의 一節(일절)<홀연히 다 떨치고 白馬(백마)에 채를 던져 山(산)이야 구름이야 정처없이 가자 하니 내 마음이 현황하여 갈 곳이 아득하다.>를 引用(인용)해 놓고 (前略(전략))
오후의 심장에 또 한 장의 낙엽이 친다.
西北航空路(서북항공로).
마지막 西北航空路(서북항공로)는 얼마나 颯爽(삽상)한 發想(발상)냐, 그러나 가을의 詩(시)는 徐廷柱(서정주)의 <木花(목화)>에서 하나의 피크를 이룬다.
누님을 가져온거나, 가을 날씨가 투명하여 바윗돌이 바스러져내리는 거나, 봄·여름의 忍苦(인고)의 結束(결속)로나, 가을날의 푸르름에 木花(목화)꽃의 붉고 흰 色感(색감)을 按配(안배)한거나 도시 蛇足(사족)이 소용없다. 여기에는 雅歌(아가)가 있고 詩人(시인)의 無爲(무위)에 대한 悔悟(회오)가 있다.
매미의 가을과 개미의 가을을 합쳐낸 이 詩(시)의 값, 이 詩(시)로 이글의 掉尾(도미)를 치레하는 까닭은 전혀 여기에 있다.
누님, 눈물겨읍습니다. 이 우물 물같이 고이는 푸름 속에 다수굿이 젖어있는 붉고 흰 木花(목화)꽃은 누님, 누님이 피우셨지요. 퉁기면 울릴듯한 가을의 푸르름엔 바윗돌로 모다 바스러져내리는데… 저, 痲藥(마약)과 같은 봄을 지내여서 저, 無智(무지)한 여름을 지내여서 질갱이풀 지슴ㅅ길을 오르내리며 허리 굽으리고 피우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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