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재 영화감독
마흔이 넘으면서 일상과 실존의 짐이 자못 무거워졌다. 작은 움직임에도 깊은 질문들이 회의처럼 뒤따랐다. 공허감 이 일상의 밑바닥까지 점령해 들어오면 서 내가 뭔가 저지를 듯한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하여 5년 전 두 돌이 채 되지 않은 아들을 뒤로 하고 한 달 간 스페인 산 티아고 순례길을 떠났다. 800킬로미터 의 장정을 열흘 만에 결정했기에 나는 제대로 준비되어있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데로 넣고 보니 배낭이 무척 무거웠다. 출국일에 수하짐 무게를 달아보니 28kg에 달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하루에 대략 25킬로미터를 걷는 길에 그 짐들은 큰 장애였다. 여정 사흘이 지나자 샴푸를 비롯해 치약 반을 짜내 버리고, 책 두 권과 대학노트 등 긴요 하지 않는 것들을 버렸다. 그리고 한주를 넘기자 다시 슬리퍼, 수건 두 장, 내의 두 벌 등 총 3킬로 가량을 내버렸다. 허나 여전히 내 짐은 남들보다 무거웠고, 매일 강행군이 끝나기 무섭게 버리고 또 버렸다. 더운 날 어깨살이 벗겨지고 발톱이 두개 빠지는 수난을 겪고서 결국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이틀을 머물며 짐을 정리하는데 놀랍게도 여정 동안 한 번도 꺼내지도 않았던 짐이 제법 되었다. 비를 대비한 판초우의나 항생제 등의 약품통이 포함되어 있었다. 막연히 미래에 대한 대비라는 이유로, 혹은 남들이 추천한 여행용품들 이 대다수였다. 만약 내가 마지막 종착지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출발할 때 분명히 알았더라면 나는 이 같은 무용한 짐들을 지고 고된 여정을 겪지 않았으리라.

기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삶의 짐을 이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짐은 삶의 연륜만큼 늘어날 뿐이지 줄어들지 않는다. 그중에서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으로 인해, 혹은 남들도 그렇게 하니까 자신에게도 얹는 무모한 짐들이 참으로 많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에 가서도 간절한 의미를 지니는 삶의 짐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지난 일 년 간 ‘목숨’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호스피스에서 지냈다. 호스피스는 말기에 처한 환자들이 평균 스무날을 머물다 가는 곳이다. 놀랍게도 이곳에 입원하는 환자들의 짐을 보면 그들의 삶이 유추될 때가 있다. 마지막 순간에도 마치 이사를 온 듯 많은 짐을 부린 분들도 있고, 가까운 소풍을 떠나듯 단출한 봇짐을 안은 이들도 있다.

우리는 언젠가는 버리겠다면서 오늘의 짐을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벗어버리지 못할 지도 모른다. 맑은 영혼으로 냉정하게 그 짐을 버려야 할 때는 바로 오직 바로 이 순간 밖에 없다. 내 삶의 여행이 가볍고 싶다면 그리고 멀리 다다르고 싶다면 더 많이 버려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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