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준 불교학부 교수
지금부터 10여 년 전, 틱낫한(釋一行) 스님은 우리대학 중강당 에서 3일간에 걸쳐 특강을 하신 적이 있다.

특강을 시작하기 전에는 석양이 물든 팔정도 교정을 많은 불자들과 함께 천천히 돌며 걷기 명상을 행하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발길이 땅에 닿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나는 도달했네. 나는 고향에 있네”를 염송하면서. 스님은 특강을 마치고 학교를 떠나기 전, 우리 동국인을 위해 붓으로 쓴 영어 경구를 남겨 주셨다. “정토는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없네(The Pure Land is now or never: 現法淨土)”라는 경구다.

이것은 지금 만해광장 입구 왼쪽의 조그만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기념석이 너무 작아 동국인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게 흠이지만.

우리는 흔히 인류의 이상향인 정토가 여기가 아닌 저 어디에, 지금이 아닌 미래의 어느 시간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리석은 착각이다. 틱낫한 스님은 그 이상향은 절대 ‘지금 여기’를 떠나서 있지 않다고 역설하신다.

정토는 완성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형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과정을 가벼이 여기지 말고 소중히 생각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결과 못지않게 과정과 절차를 중시해야 한다. 불만족스런 현실을 남의 탓으로 책임전가하기 보다는,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지혜와 자비의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절망과 포기는 금물이다. 힘들수록 바로 여기가 내 삶의 터전임을 알고 인내하며,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처럼 존중하고 공경해야 한다. 스님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라고 가르친다. 물 위를 걸어가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현재 이 순간 푸른 대지 위를 걸으며 느끼는 아름다움, 가슴 속에 번지는 평화가 기적이라고 강조하신다.
생각해 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물론, 지구별을 포함한 일체만유 삼라만상이 기적 아닌 것이 없다. 저 광활한 무한의 공간 속에서 지구별은 한낱 먼지 티끌이며, 인간은 티끌 속의 티끌일 뿐이다. 그 미진 속에서 우리가 생명의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은 정말 희유한 일이다.

또한 무시무종의 영원한 시간 속에서 우리가 향유하는 100년의 시간은 그야말로 부싯돌을 부딪칠 때 번쩍 빛나는 순간의 빛에 불과하다. 그 찰나의 시간에 우리가 울고 웃고 욕망하고 꿈꾸며 사랑하고 싸운다는 것, 그 또한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을의 향기가 짙어가는 만해광장 입구 기념석에 새겨진 스님의 가르침 앞에, 우리 모두는 옷깃을 여미고 겸허하게 서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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