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내밀한 곳과 조우하는 산책길

▲ 어느 작가의 오후 (Nachmittag eines Schriftstellers)
지은이:페터 한트케 / 옮긴이:홍성광 / 펴낸곳:열린책들 / 8,800원 / 152쪽

피터 한트케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

‘내 스스로에 대해서만 서술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서술하는 데는 흥미가 없다’거나, ‘나는 작가로서 일상적인 현실을 제시하거나 극복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의 현실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는 페터 한트케에게 문학이란 일종의 언어적 유희일 뿐이다.
작가의 할 일은 독자 스스로가 현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저만의 작업실을 만들어주는 것뿐이라 한다.
당연히도 사고와 언어라는 기본요소만으로 무형의 틀을 만들어내는 순수문학에 대한 지지자이며, 참여문학은 문학의 본 갈 길이 아니라 비난하기도 한다.
‘내면세계의 외부세계의 내면세계’라는 시를 통해 그의 세계관 일부를 엿볼 수 있다.

“우리가 근심이 없으면 파란색의 트레이닝복을 입고 조깅하는 사람이 우리 곁을 지나가는 것을 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마음이 편치 않게 되면 그 조깅하는 사람이 내리막길을 달리는 것을 본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불안하게 되면 그 조깅하는 사람이 트레이닝복을 입은 것이 아니라 달리는 것에 방해가 되는 긴 외투를 입고 내리막길을 달리는 것을 본다”

외적인 세계는 자체로 존재하기보다 인식의 주체인 자아의 다양한 감정 상태에 기반을 두고 그 속성을 달리한다.
그러니 가치를 얻는 쪽은 외부세계나 객관화된 관계가 아닌 내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진행되는 감정의 동요나 주관의 흐름이 되고, 문학의 중요성은 작가 자신의 의식 너머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수단으로서, 독자 자신에게는 기존의 익숙한 시선을 거두고 작가가 제시한 일체의 것들을 의심하거나 재해석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가치를 가질 뿐이다.
외부세계가 부여하는 편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고양시킬 수 있는 방법은 내면세계 속으로의 탐닉 외에 방법이 없다는 의미로,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원작인 ‘베를린의 하늘’의 작가로도 알려진 한트케가 세계와 문학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작업실이 갖는 두 가지 상징

“12월초의 어느 날, 오후 시간... 작가는 서재를 벗어나 도심으로 산책길에 나선다. 그리고 다시 서재로 돌아온다...”

작가가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 날리는 첫눈을 제외하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출판사의 안내 문구가 그리 과장되지 않았음에 수긍하며, 페터 한트케가 1987년 발표한 ‘어느 작가의 오후’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물론 이건 서사를 기준으로 할 때의 요약으로, 서사를 제외한 나머지에 대한 정리는 필요를 못 느낄뿐더러, 실상은 정리 자체가 불가능하다. 한 인간의 내밀한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흐름을, 내적인 감정들의 반영을 거친 대상들의 요란스러움을 단출하게 정의해보기란 어려운 탓이기도 하다.
보통, 작가라고 하면 하나쯤 갖고 있을 그만의 작업실이 있을 테다. 은밀하고도 폐쇄적인 분위기로 메워져 있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별도의 공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외부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자아탐색이 진행되는 내면의식이 여러 갈래 흐름으로 뭉뚱그려 지거나 갈라서는 지점의 상징일 수 있다. 작가 개개인의 독특한 시선은 이런 물리성과 상징성을 갖는 작업실을 통해 물씬 우러나오기 마련이다. ‘어느 작가의 오후’의 화자이며 페터 한트케의 분신일 작가가 산책에 나서기 직전 머물러 있던 물리적 공간이면서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영 머물러 있어야할 상징적 공간에 대한 비유로 작업실이 이해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책길과 함께하는 고단한 인식

작가는 어느 오후, 작업실인 자신의 서재 책상 앞에서 몸을 일으킨다. 여러 상념을 흘리면서, 주변 보이는 것들과 미처 보이지 않았던 대상들과 끊임없이 관계하며 산책길에 나선다.
그가 몸을 일으킨 작업실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집 2층의 서재일 수도, 아니면 작가 내면의 은밀한 어느 지점일 수도 있다. 그러니 도심 여기저기로의 산책길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거니는 평범한 일상일 수도, 머릿속 깊이 감춰진 공간을 파고드는 의식의 거닐음에 불과할 수도 있게 된다.
사실, 진정 산책길에 나서지 않았다면, 만났던 사람들의 시선이나 대화, 만지작거렸을 대상 일체에 대한 거짓부렁의 나열에 불과해지지만, 정말로의 산책길인지 그저 의식 저 너머로 침전하는 재잘거림에 불과했을지는 별반 중요치 않을 성 싶다.
데면데면한 듯 다가오는 주변들에 대한 묘사와 비유, 상상을 동원한 훼손의 과정 그리고 몇 가지 화두를 산책하듯 따라다니면 될 일이다. 그 안에서 남는 건 독자 자신의 과제뿐이다.
작가가 무어라 하는 것들엔 별다른 의도가 없어 보이는 탓인데, 의도가 없다함은 언어적 유희만이 지나치다는 비난이기보다 독자인 당신은 이래라 저래라 라는 식의 강요가 없다는 쪽에 가깝다.
그러니, 한 문장, 한 문장 속을 산책하듯 거닐어야할 사람은 작가가 아닌 독자 스스로가 되어 버린다. 작가의 고단함 등에 대해 쉬지 않고 중얼거리기만 한다. 어떤 의미로, 어떤 사정으로 받아들일 지를 작가의 의무가 아닌 독자의 과제로 몰아붙이는 듯하다.
평생 동안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제시켰다며 작가의 사회적 위치를, 말뿐만 아니라 그들의 호흡도, 소리마저도 모두 그를 향한 것이었다며 작가의 인식을, 내가 이웃을 갖기를 바란 적이 있느냐 물으며 작가의 고립을, 자신이 쓴 내용이 어느 선구자의 저서에 대한 재판(再版)에 불과했다 탄식하며 작가의 고뇌를……. 작품이 갖는 가치나 글쓰기의 불안과 그 외의 많은 것들을 던져두고 만다. 친절한 답 따위는 없다. 독자가 스스로의 이해와 인식정도를 밑바탕으로 곱씹고 되뇔 고단함만 남는다.

각자의 자아와 조우해야할 의무

내 자신과의 조우를 위해 몇 번이고 다시 펼쳐야할 책이 분명히 있음에 다시 한 번 동의하게 된 계기. 단 한편에 몇 시간을 길게는 몇 날을 꼬박 투자해야한다는 부담이 있기야 하지만, 책 읽기 또한 한 작가만을 극성으로 좇아가려는 시도 자체가 이해에 보탬이 될 수 있음을 교훈으로 각인하게 된 계기.
그게 무어든 좀 더 다양하게 바라보고 되묻자 라고 새삼 떠올린 계기.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가 남긴 것들이다. 그리고 이 높고 깊어 가는 가을 하늘 아래, 대학이란 곳의 일부에 발 담그고 있는 우리들이 나 자신과 주변 또는 저 너머 무언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늘 상기해야할 것이기도 하다. 각자가 갖고 있는 저만의 작업실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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