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학종 미디어붓다 대표

‘가야산 호랑이’ 성철스님께서 “절은 불공(佛供) 방법을 배우는 곳이고, 불공은 중생 속에서 드리는 것”라는 법문을 해서 한 동안 불교계를 들썩이게 한 적이 있었다. 불공을 올리려 절에 가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던 현실에서 성철스님의 이 한 마디는 불교계의 잘못된 신행형태를 예리하게 지적한 것이었다.
당시 조계종의 종정으로 계셨고, 생불(生佛)로 추앙받던 성철스님의 말씀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분이 이런 말씀을 했더라면 큰 사단이 날 말씀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불교계가 성철스님의 이 말씀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였다면, 오늘날의 한국불교 모습은 지금보다 훨씬 향상된 모습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도 한국불교의 대부분 사찰들은 재가자들의 자발적 보시보다는 절을 찾아와 올리는 불공에 재정을 의지하고 있다. 그 비중은 오히려 성철스님이 그 말씀을 할 때보다도 더 팽배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달 교황 프란치스코의 4박5일 한국방문은 많은 울림을 우리 국민들에게 주었다. 평소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강하게 비판하고, 교회를 향해 어려운 자의 편에 서라는 주문을 해왔던 그의 신념이 방한기간 동안의 행적 곳곳에서 묻어났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세월호 유족들)을 보면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고 고백한 교황의 말씀은 성철스님의 “불공은 절이 아닌 중생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씀과 다르지 않다.
불교는 지혜와 자비(복덕)를 두 기둥으로 하는 종교이다. 수행정진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지혜를 완성하는 것, 중생과 이웃을 위해 바라밀행(자비보살행)을 실천하는 것 두 가지가 동등하게 구현되어야 온전한 불교가 된다. 예불 때마다 부처님을 양족존(兩足尊)으로 부르며 귀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양족이란 지혜와 복덕, 즉 복혜(福慧)를 다 갖췄다는 뜻이다.
한국불교의 대사회적 역할이 증가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웃종교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것이 불교 교세의 정체 또는 축소의 원인이라는 데 이의를 달기는 어렵다. ‘보살이 어디에 있는가’ 했더니,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병원과 복지시설에 가보니까 거기에 꽉 찼더라’는 한 스님의 겸연쩍은 탄식을 준엄한 채찍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격언이 있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멀었다. 한국불교가 지금이라도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뼈아프게 받아들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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