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 타파, 지난 정치인생 목표였습니다”

 

7.30 재·보궐선거에서 전라남도 순천·곡성지역의 개표 결과가 발표되자,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철옹성 같던 야당의 텃밭인 호남지역에 여당 정치인이 당선된 것이다. 19년 간 3번을 출마해 모두 낙선했고 4번째 도전끝에 당선의 기쁨을 안은 우리대학 정치외교학과 78학번 이정현 동문을 만나, 그가 내걸었던 진심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2004년 광주 서구 을 출마. 득표율 1.03%. 2012년 광주 서구 을 출마. 득표율 39.7%. 모두가 말렸던 호남 지역구를 선택해 연이어 출마했던 그의 정치행보는 많은 이들의 걱정처럼 계속된 낙선으로 이어졌다. 집권여당의 최고 위원이자 청와대 전 홍보수석. ‘쉬운’ 당선의 길이란 없지만, 지역주의가 확고한 우리나라 정치문화 특성상 마음만 먹으면 ‘보다 쉬운’ 당선의 길을 선택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2014년 7.30 재·보궐 선거에서 서울지역에 출마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는 다시 한 번 호남지역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마침내 3전 4기의 성공을 이루어낸다. 어떠한 지역을 막론하고 공약과 인물에 대한 평가 없이 일당 독주체제가 이루어지는 선거성향을 반드시 깨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제가 태어나고 자란 호남에서부터 뿌리 깊은 지역주의 성향을 바꿔보고 싶었다”며 “이러한 지역주의 정치체제는 지역발전 뿐 아니라 나아가 대한민국 정치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차 대신 자전거 타고 눈길 마주쳐

이번 7.30 재·보궐 선거에서 이 동문의 ‘트레이드마크’는 ‘자전거’였다. 매일 스무 개가 넘는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그는 15년 된 낡은 자전거 한 대만을 고집했다. “자동차를 타면 금세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내려서 대화하고 싶은 사람과 마주할 수가 없다”고 운을 뗀 그는 “자전거로는 골목을 돌아다니며 유권자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보며 직접 이야기 할 수 있기에 이동 수단으로 자전거를 택했다”고 말했다. 자전거에 올라 사람들과 한 명씩 인사를 나누는 그의 모습은 유권자들의 아날로그 감수성을 정확히 관통했다.

가장 힘들었던 건 고정관념 타파

이 동문이 선거유세를 하며 가장 어려웠던 것은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당선이 “완벽히 고정관념을 깬 것이라고는 섣부르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일단 한 번 기회를 주어 보겠다’라는 의미임을 잘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세 번의 낙선을 통해 고정관념을 깨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출마지역인 순천·곡성에 대한 ‘예산’공약과 ‘지역주의 타파’에 대한 그의 정치적 소신은 유권자들의 고정관념을 ‘빨간불’에서 ‘노란불’로 바꾸는 것에 성공했다. 그는 “지나온 19년간의 정치활동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고정관념’을 깨는 일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비주류 …비주류 심정 잘알아"

지금은 여당의 주요 인사이자, 누가 보아도 ‘주류’ 정치인이지만 그는 스스로 그를 ‘비주류’였다고 말한다. 1985년 전남도지사를 지낸 민정당 구용상 전 의원의 총선 캠프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 이후 약 17년이 지난 2002년에야 이회창 후보 캠프의 전략기획, 19년이 지나서야 2004년 한나라당 수석부대변인 등의 직책을 맡게 된다. 이 동문은 “호남출신으로 새누리당의 국회의원으로 이만큼 성장하는 동안, 비주류로 오랜 기간을 보냈다”며 “그래서 어떤 누구보다 비주류의 심정과 자존심 상할 때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이번 당선으로 목소리를 강력하게 낼 수 있게 된 만큼, 서민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을 살필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비주류의 삶이 ‘과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부정과 부패, 부당한 압력을 외면하고,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비주류를 위한 정치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학시절 그렸던 정치와 현실정치

이 동문은 우리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면서 진지하게 정치인이 되기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세웠다고 했다. 때문에 지금도 학교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고 강조했다. 학부시절 그가 꿈꾸었던 정치는 ‘통합의 정치’였다. 그리고 그 신념은 아직도 유효하다. 지역과 이념, 세대, 계층 간의 갈등과 선긋기를 극복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 현실 정치에 뛰어 들어 마주한 지역주의와 갈등의 깊이는 생각보다 더 깊었다. 심지어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이를 깨부수려는 노력을 ‘포기’한 것처럼 보여서 답답했다고 했다. 그는 대학시절 그려왔던 정치 청사진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며 동악에서 그렸던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대해 되짚었다.

“동국야구 전성기 지금도 생생”

이 동문은 동기들과 야구응원을 다녔던 일을 대학시절의 가장 즐거웠던 추억으로 꼽았다. 당시 교수님들께는 정말 죄송한 일이지만 야구하는 날이면 수업도 듣지 않았다고.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 제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동국야구의 전성기 시절이었다”고 이야기를 시작한 그는 “김인식감독, 김성한 선수를 포함한 아주 유명한 선수들이 많았다. 그래서 대학야구 경기가 열리는 날은 단 한번도 수업에 들어간 적이 없다”고 회상하고는 머쓱한 듯 웃어보였다. 항상 야구장에 앉아서 응원가를 부르고 있었다고 했다. 또한 그는 대학시절 남산 뒷길을 혼자 걸어 올랐던 일 또한 기억에 남는다고 덧붙였다. 상록원 뒤 남산 오르는 길은 이 동문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많은 동국인들이 애용한 길이었고, 그 길을 걸으며 ‘내가 선택한 길이 과연 맞는가’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는 것이다. 자신 인생을 다듬었던 그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끊임없이 세상에 관심을 가지기를

이 동문은 후배들에게 “끊임없이 세상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신문과 뉴스, 정치와 시사 등 세상 돌아가는 일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동문은 학창시절 신문의 석간과 조간을 모두 살펴보고 주요 일간지부터 작은 단신들을 싣는 신문들까지 모두 샅샅이 읽었다고 말했다. 번거롭고 때로는 귀찮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세상 읽는 법을 배웠고 많은 것을 얻었다고 했다. 특히 이 동문은 젊은이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관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며, 동악을 누비는 후배들이 반드시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와 환경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그 흐름 속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에 대해 꿈과 생각을 품는 사람이 되어주기를 당부했다.

이정현 동문 프로필 △ 1958년 전남 곡성 출생 △ 1985년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졸 △ 2002년 한나라당 16대 대선 전략기획단장 △ 2004년 17대 총선 광주 서구 을 한나라당 후보 △18대 국회의원(비례대표) △ 2008년 동국대 행정대학원 객원교수 △ 2013 청와대 홍보수석 △2014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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