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여행하고 쓴 최부의 136일간 기록 '표해록' 현장을 가다

▲ 명,청시대 운하길

  1487년 9월, 최부는 추쇄경차관으로서 제주에 갔다. 추쇄경차관의 임무는 도망친 죄인을 잡아들이는 것이었다.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고향인 전라남도 나주로 돌아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 최부 초상화
  최부와 함께 한 42명의 일행은 16일 동안 표류해 중국의 저장성 닝보시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당시 중국을 상대로 노략질을 일삼았던 왜구로 오해받아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조선의 관직을 가진 사대부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내륙 대운하를 따라 베이징으로 호송되어 명나라 황제 홍치제를 만났다. 최부는 중국에 체류한 지 136일 만에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최부가 한양에 도착하자 조선의 제9대 국왕인 성종(成宗)의 명을 내려 청파역에 일주일간 머물면서 견문기를 남기도록 했다. 이 책이 바로 ‘표해록’이다. 조선인으로서 중국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강남지방을 여행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표해록은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사료로 평가받는다.

  충무역사탐방단은 중국 닝보, 쑤저우, 항저우, 우전, 상하이에 이르는 조선시대 문인 최부의 여정을 되짚어보기로 했다. 서류심사와 면접을 통해 구성된 22명의 충무역사탐방단은 6월 26일 이른 아침 인천공항에 집결했다. 이번 탐방은 우리대학 사학과 서인범, 노대환 교수의 인솔 하에 진행됐다.

  공항 대기시간, 학생들의 사전조사를 통해 만들어진 역사탐방 책자를 살펴보았다.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멀게만 느껴졌던 중국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상하이푸동공항에 도착했다. 한국보다 더울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중국 사람들은 2시간 거리는 옆집에 가서 차 한 잔 마시는 거리예요.” 공항을 떠나 첫 탐방지인 닝보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한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비행을 마치자마자 4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닝보를 향해 달렸다. 운하가 발달된 지역답게 창 밖 풍경은 크고 작은 실개천들이 널려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은 세계에서 4번째로 면적이 넓은 나라인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닝보로 이동하는 사이, 중국에서 첫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음식점에 들어가는 순간 풍기는 향신료 냄새를 맡으며 중국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낯선 향 때문이었을까, 대부분 학생들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테이블 위에 강한 향을 내뿜으며 먹어주길 바라는 음식들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륙교통의 요충지 닝보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부터 계속해서 내리던 비는 닝보에 도착할 때 즈음 그쳤다. 우리가 처음으로 찾은 명소는 ‘천일각’이었다. 천일각은 세계 3대 도서관으로 손꼽힌다. 명(明)대 범흠이 서적을 수집·보관하기 위해 세운 개인 장서각이다. 청(淸)대 범흠의 후손들이 천일각 주변에 가산을 만들고 대나무를 심어 주변 환경이 더욱 장관을 이루었다.

  천일각을 둘러보며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건물 곳곳에 초록 이끼가 자리 잡고 있던 것이다. 벽에 낀 이끼를 보고 닝보의 평소 날씨가 굉장히 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지은(영어영문 3) 양은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 강남지방에 비가 많이 온다는 소리를 들어서 걱정했다. 비가 온 후, 천일각에 안개가 낀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로웠다”며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이만큼의 감동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첫 탐방지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설명중인 서인범 교수
  닝보는 장보고의 해상 실크로드 시발점이다. 또한 북송 시기부터 고려와 공식적인 사신을 교류하며 민간무역도 활발히 행해졌던 곳이다. 닝보에 위치한 고려사신관에는 우리대학 사학과 윤명철 교수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다른 나라의 명소에 자랑스럽게 걸려있는 동문의 사진을 보니 매우 뿌듯했다. 장보고가 동아시아 해로를 장악할 때 지나간 항로를 재현하기 위해 뗏목을 타고 3000㎞에 달하는 바닷길을 43일 동안 이동한 것을 사진으로 남겨놓은 것이다.

  고려사신관에 들어서자 한 폭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고려 사신을 맞이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이었다. 해로를 통해 남송의 수도였던 임안(지금의 항주)로 가려면 항구도시인 명주(明州)를 거쳐야했다. 이에 송나라 조정은 명주에 고려사신관을 건설하여 사신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훗날 중국 명(明)왕조가 세워지며 명주(明州)의 명(明)이 국호와 같아 이를 피하기 위해 지명을 닝보(寧波)로 바꿨다. 예로부터 닝보는 저장성의 정치, 문화, 군사적 요충지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최부는 닝보를 “기묘함과 아름다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묘사하며 명대의 찬란했던 문화를 기록했다. 또한 “성 둘레의 넓고 좁음은 알 수 없다”하여 닝보가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교육과 문화의 도시 쑤저우

  이동하는 차 안에서 거리를 보니, 벽은 온통 하얀색이고 기와는 전부 검정색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옛날에 강남지방에서 과거합격자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흰 벽은 종이를 상징하는 것이고 검정 기와는 벼루를 상징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과거에 급제했으면 쑤저우 일대의 가옥형태가 이런 양식인 것인가 상상이 안됐다.

  최부는 쑤저우에 대해 “기름진 땅은 천리나 되고 사대부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설명했다. 교육과 문화가 발달된 도시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중국 4대 명원으로 베이징의 이화원, 승덕의 피서산장, 그리고 쑤저우의 졸정원과 유원이 꼽힌다. 탐방단은 4대 명원 중 제일이라 불리는 졸정원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원을 가게 됐다.

  졸정원에 들어서자마자 미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찾을 수가 없어 한동안 같은 자리를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중국 정원의 자존심, 중국의 4대 정원이라는 졸정원이 볼 것도 없고, 너무 작은 게 아닌가? 실망스러운 마음에 벤치에 앉아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사람들이 한 길로 계속해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에 따라가 봤다.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헤매고 있던 곳은 고작 입구에 불과했다. 아무리 가도 처음 보는 곳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면적이 넓은 중국이라고 하지만 개인소유의 정원이 이렇게나 클 줄은 몰랐다. 서대현(경찰행정 3) 군은 “멋진 곳에서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살아간 옛 중국인들이 부럽다”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유원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화창(花窓)이라 불리는 유원의 창문을 통해 바라본 외부 풍경 은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유원 내의 화창은 전부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자리를 옮겨갈 때 마다 다른 느낌의 정원을 연출한다. 정원을 돌아다니며 창밖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 유원, 관운봉
  유원의 동쪽 정원에 자리 잡고 있는 관운봉은 태호석의 왕이라 불린다. 중국의 대표적 기석인 태호석은 석회암이 용해하여 기이한 형태를 이룬 돌덩어리로 정원이나 화분 등의 관상용으로 많이 쓰인다.

  최부는 “예로부터 천하에서 강남을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했고, 강남중에서도 소주와 항주가 제일이었는데, 이 성(소주)이 더 뛰어났다”며 쑤저우의 아름다움을 극찬했다.

물의 도시 우전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중국 대다수의 도시와는 다르게 우전지역은 수향(水鄕)마을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동양의 베니스라고 불리는 우전은 서책과 동책으로 지역이 둘로 나뉘어있다.

  우전은 삼백주와 천연염색으로 유명하다. 아직까지도 이곳에는 옛 모습을 간직한 양조장과 천연염색 박물관이 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유명했던 우전의 천연염색을 재연했을 뿐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전 거리를 구경하며 억지로 꾸며놓지 않은 곳, 옛 모습 그대로 보존이 가장 잘된 곳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 서책의 새벽
  우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서책의 야경이다. 자그마한 나룻배를 타고 서책의 야경을 감상했다. 중국 고전영화에서나 나올법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지만 눈에 담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았다.

장찬송(식품공학 3) 양은 “우전의 야경도 매우 좋았지만, 새벽녘의 우전은 청초한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며 “우전만큼 중국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던 곳은 없었다”고 평했다.

  최부의 표해록에는 우전이 언급되지 않았다. 최부의 항로는 우전을 거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인범 교수는 “최부가 우전에 들렸다면 수향의 아름다움을 기록했을 텐데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상하이, 항저우, 임시정부청사

   마지막 탐방지인 상하이임시정부청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임시정부청사가 몇 년 후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다. 임시정부청사가 상하이의 재개발 계획에 따라서 철거가 된다는 말이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중국 정부와 합의안을 도출해 유지비를 지불하며 관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헌법에 명시된 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에서부터 나온다. 그런 의미를 가진 정부청사가 철거될 수도 있다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정부청사의 맞은편엔 쇼핑몰 등의 높은 건물이 있었다. 임시정부청사로 인해 재개발을 하지 못하는 중국인의 불만이 이해가 되면서도 대한민국의 역사적 장소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임시정부청사를 둘러본 뒤 권하늘(법학 4) 양은 “여태껏 머릿속에 그려왔던 임시정부청사의 모습과 매우 달랐다”며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청사는 윤봉길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항저우로 내려오게 되었다. 항저우임시정부청사는 임시정부요인들의 생활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놓았다. 책상, 침대, 지금과는 형태가 다른 태극기까지. 1932년 5월부터 1935년 11월, 항저우에서 임시정부 활동을 하는 기간에도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나라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의 과정들이 임시정부청사의 벽면에 자세히 나타나있었다.

▲ 항저우임시정부청사 앞 탐방단

 

  5박 6일간의 역사탐방이 끝이 났다. 중국음식을 먹기 힘들어했던 22인의 탐방단은 어느덧 중국 향신료에 익숙해져 있었다. 낯설기만 했던 중국 음식문화에 적응하듯, 생소하게 느껴졌던 중국의 문화와 역사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 노명준(회계학 3) 군은 “평소 중국 역사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중국 역사에 대해 관심이 생기고,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며 이번 탐방이 뜻 깊었다고 말했다. 운하를 기반으로 번성한 중국 강남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경험하니 세상은 넓고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말이 실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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