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에게 ‘핏대’ 라는 별명이 붙은 지 오래다. 전공분야도 아닌 일에 동네걱정까지 도맡아서 열을 낸다는 뜻이라 했다. 그러니까 70년대 전반엔 밖에서 귀국한 끝이라 잠잠하더니 근년에 이 괴벽이 되살아나서 고통을 겪고 있다.

요새 젊은 세대의 말씨하며 어법이 도대체 틀렸다는 것이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의 동심이 아직도 살아있는데, 이것이 쨍하고 해뜨는 망종으로 돌변하는 꼴을 보고 화가 치밀었다. 해가 쨍하고 뜨는 법도 있느냐는 것이다.

어느 내노라하는 댁 약혼식에 자리하고 듣자니 양가 어른 면전에서 신랑감이 배우자의 이름을 이웃 강아지 부르듯 한다. 부모 앞에서 어른이 된 누이동생 이름을 대는 것도 주저하는 법인데. 예식장에서 사회자는 주례사가 끝나면 이이서 그 내용에 관하여 음미조의 주석까지 멋대로 달고 나서면서, 참 적절한 주례사였던 것 같다(사실은 아닌데?) 고 평론이다. 마이크 앞에 서는 사람의 말투에 의하면 심한 경우,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비가 오는 것 같다고 한다.

사위는 장인을 직접 지칭하여 ‘장인어른’ 이란다. 장인은 ‘장인’ 소리에 안경을 들먹이다가 ‘어른’ 소리에 분간이 어려워져 신음에 가까운 대답이다. 젊은세대의 언어생활에 문제가 있을 경우 우선 매스컴의 책임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기관에 종사하는 당사자나 글을 써서 내는 사람이나 이렇게 발전이 없고 무책임할 수 있으냐는 말이다. ‘길거리’의 ‘거리’는 ‘먼거리’로 몰아읽고 ‘오히려’는 ‘차라리’로 혼융되어 버렸다. 이 글을 쓰는 오월 마지막 일요일 아침에 신문을 받아 보고 또 혈압이 올랐다. 20년 전에 어느 노작가와 신문사 간에 있었던 촌극의 주인공이 평소대로 버젓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X는 안절부절, 안절부절하고 있습니다’

본래 말의 속성이, 다 옳게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불려 온 학생의 ‘오시라고 해서 왔습니다’는 그럴싸한 애교라도 있다. 배우고 가르치고 고칠 수 있는 과오가 20년 전의 것과 같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요새는 대학생이 부른 유행가 중에 ‘…자기네 땅이라고(제땅이라)’가 못마땅해서 입맛이 없다. 몇몇 이미 언급되었던 것을 가지고 몸에도 좋지 않은데 말이 많다는 욕을 벌까봐 필자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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