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학술상 창작분야 가작 1석

아버지는 제방으로 건너가는 다릿목에 벌렁 드러누워 “날 깔아뭉개고 가그라 이놈들아!”

하고 미치광이 마냥 두 눈을 부릅뜨고 불도저를 노려보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내가 역 앞의 허름한 여관방에서 눈을 뜬 것은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였다. 나는 깜짝 놀라 웃목에 벗어놓은 남방셔어츠와 어깨끈이 달린 밤색 가방을 치켜들고 부랴부랴 밖으로 나왔다. 잠깐 눈을 붙이고 통금이 해제되면 읍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려고 했었는데 너무 깊이 잠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어제 밤엔 야간열차에 시달리면서도 나는 아버지에 관한 추억으로 심경이 착잡하여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허나 새벽 두시경 열차에서 내렸을 때, 나는 비로소 지난 며칠동안 거의 철야하다시피 현장공사에 매달려왔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피곤과 졸음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와서 10km의 읍내 길을 걸어 들어가기로 작정했던 애초의 생각을 포기하고 말았다.

정류장에는 읍으로 떠날 버스 가시등을 걸어 놓은 채 승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구겨진 전보용지를 꺼내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그리고는 발기발기 찢어 한낮의 뜨거운 햇살로 눅진해진 버스의 고무타이어 밑에 던져버렸다. 바람이 불어와서 종이 조각들은 땅에 닿기 전 가볍게 나풀거렸다. 나는 버스의 배기가스를 맡자 역한 차멀미 증세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부친의 위독을 알리는 지급전보는 어제 오후 신축공사 현장사무소로 전달되었다. 본사로 배달된 것을 문서수발 담당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가지고 왔다.

전보를 펼쳐 든 내 손은 아버지의 수전증처럼 가늘게 떨렸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몸져 누운지도 벌써 오년이 지났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그 기간 동안 아버지는 무너진 토담 밖으로 단 한 발짝도 거동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허옇게 백태가 낀 혓바닥을 길게 뽑아 크윽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그러면 찬바람에 우는 문풍지마냥 목구멍을 글겅거리던 시커먼 가래가 껍질을 벗겨낸 말랑 말랑한 석화같이 꿈틀거리며 혓바닥을 타고 넘어왔다. 어머니가 재빨리 빈 화장품 곽을 갖다 대면 아버지는 멀뚱하게 가래를 아가리 속으로 뱉어 넣었다. 어머니는 그 많은 날들을 하루같이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고된 수발을 들면서도 짜증 섞인 신세한탄이라곤 늘어놓은 적이 없었다.

나는 성난 짐승마냥 으르렁거리는 착암기의 굴착음을 피해 철거중인 건물 뒷켠으로 돌아갔다. 제멋대로 뒹구는 까만 기왓장 하나를 깔고 앉아 나는 고개를 꺾고 슬픔을 삼켰다. 작년에 발생한 화재로 시커멓게 타버린 내장을 얼마 전에야 긁어낸 그 공공건물은 앙상한 뼉다귀를 드러낸 채 참혹하게 건들거리고 있었다. 요즈음은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구식 목조건물인지라 철거작업은 한결 용이했다. 도시계획 입안자들은 대도시 중심가에 그런 목조건물이 아직도 잔존해 있다는 사실을 도시발전의 저해 요소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화재가 발생하자 그들은 앓던 이 빠진 듯 시원해서 수월하게 그 자리에 고층건물을 건립할 계획을 세웠다.

쇠망치로 건물벽을 후려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인부들이 투덜대며 지껄이는 욕지거리가 터무니없이 크게 들려왔다.

현장사무소로 돌아오니 소장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기사, 얼마나 상심이 큰가?” 소장은 진심으로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 주었다. 나는 거듭 고마움을 표한 다음 밤차 시간에 늦지 않도록 서둘러 현장사무소를 나왔다. 등 뒤에서 건물의 한쪽 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흙먼지가 뽀얗게 피어 올랐다.

버스는 빈 자리가 채워지자 곧 출발했다. 읍내로 들어가는 이차선 지방도로는 말끔하게 포장되어 있어서 노변의 가로수들이 유난히 푸르러 보였다. 전에는 길 가운데 널브러져있던 작은 돌멩이들이 써걱거리며 차바퀴에 물리는 소리가 읍정류장에 다다를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읍에 들어서는 길목에 이르면 제분공장에서 쏟아져 나온 썩은 고구마가 갈탄 무더기마냥 엄청나게 쌓여있어서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동생인 영례가 이 공장에 다닐 적에는 기계가 활발히 가동되었다. 영례는 격일제의 야간 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허나 최근에는 수요량이 격감되어 생산량을 절반으로 줄여야할 만큼 공장운영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버스는 이십분도 채 안되어 읍정류장에 도착했다.

읍내 사거리에서 곧장 왼쪽으로 공원을 끼고 들자 곡동 마을로 향하는 긴 냇둑이 나타났다. 일자(一字)로 쭉 뻗은 길고긴 제방의 끝에서 직각으로 꺾여진 좁은 길을 따라가면 내 고향인 곡동 마을이었다.

곡동 마을은 농경근대화의 일환으로 경지정리를 실시할 때 천수답을 수리안전답으로 변경하기 위한 제방공사도 동시에 착수했다. 그 결과 배산임수의 알맞은 마을의 입지적 조건을 갖춘 곡동 마을은 농경근대화의 실질적인 혜택을 가장 은성하게 부여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 집만은 유일한 예외였다.

나는 좁은 길로 접어드는 갈림길에 서서 발길을 멈추고 잠시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마을 입구에 올연히 뿌리를 박은 둥구나무 밑에는 몇몇 노인네들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 한가로이 곰방대를 빨고 있다. 다복솔이 무성한 뒷산 숲속에서 꽁지 긴 장끼 한 마리가 푸르륵 날아올랐다가는 이내 녹음 속으로 사라졌다.

세 아름이나 되는 크고 오래된 둥구나무는 수령이 백 년이 넘었다는 사람도 있었고, 혹은 몇 백 년이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사람도 있었다. 속이 텅 빈 밑둥아리는 동굴처럼 캄캄했다.

어렸을 적 나는 둑길에서 토끼풀을 뜯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면 박쥐처럼 그 안에 들어가 감쪽같이 비를 피하곤 했다. 돌출한 혹들로 울퉁불퉁해진 표피는 붙어서 쩍쩍 갈라졌고, 그 틈새에는 회백색의 살짝수염벌레가 바글거렸다. 철이 들면서 줄곧 외지로만 떠돌았던 나에게는 둥구나무가 모진 풍상을 견디어 온 뼈아픈 고통의 흔적처럼 눈물겹게 여겨졌다.

아버지의 풍병(風病)은 마을 앞 사행천의 물길을 바꾸기 위해 냇가 주변의 전답에 대한 대대적인 측량이 시작되고부터 조금씩 도졌다.

이전에도 아버지는 온몸에 힘이 빠져 감각이 없다면서 어머니더러 가끔 팔다리를 주무르게는 했지만 손수 닷 마지기 논농사를 지을 만큼 기력이 좋으셨다. 아버지는 열세살 때 가출하여 수년간 대장간에서 함마를 쳤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나이에 비해 근력이 대단해서 추곡수매 때면 나락 가마를 번쩍 들어 올려 구루마에 싣곤 했다. 아버지는 직접 구루마를 끌고 공판장에 가서 등급 매기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번은 싣고 간 열가마가 모두 2등과 3등 판정만을 받게 되자, 화가 난 아버지가 색대질을 잘 못한다고 검사원의 가슴을 툭 밀쳤는데 그만 검사원이 넉장거리를 치고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런 아버지가 풍증을 얻은 뒤로는 뼈마디가 결리거나 부어올라 굴신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측량이 시작될 무렵, 내가 입영통지서를 받고 고향에 내려와 소일하고 있을 때였다. 측량사들이 제방에 측량대를 세워놓고 새로 물길이 뚫릴 위치와 방향을 재려고 하자 물꼬를 보러 나온 아버지가 그들에게 다짜고짜로 삿대질을 하면서 측량을 방해하고 나섰다. 그들과 옥신각신 다툼을 벌이자 마을 청년회 고문인 황씨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황씨는 상이경찰로 인공때 배에 총을 맞아 원호대상자가 되었는데 제방공사가 끝나면 수리조합 직원으로 발령 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황씨는 경지정리와 제방공사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수리시설과 관개개량은 농경근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럼으로써 마을 주민의 의사를 하나로 집약시키고자 노력했다. 반대하는 몇몇 주민들은 자기네 소유의 전답이 제일 비옥한 토지라고 믿고 있는 축들이었다. 그 때문에 경지구획정리과정에서 자기네 옥토가 하루 아침에 다른 사람 소유로 둔갑하지 않을까 노심초사 마음을 졸였다. 물론 아버지도 그런 이유에서 반대하는 주민들중 한 사람이었지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황씨는 아버지가 워낙 막무가내였던 탓인지 우리 집에는 찾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와 측량사들 사이의 다툼을 말리려고 나선 황씨가 “저 최영감님..” 하고 아버지의 소매를 잡아끌며 만류하자 돌연 아버지는 황씨의 빰을 철썩 때렸다.

“이 놈아, 수랑(수렁)에서 구신(귀신) 난다. 구신 나!”

순간 나는 성미가 거칠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황씨가 냅다 아버지의 가슴팍을 쥐어박으며 분기를 못이겨 펄쩍 뛸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추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뜻밖에 황씨는 벌겋게 충혈된 왼쪽 뺨을 그저 계면쩍게 문질러 보았을뿐 침먹은 지네마냥 움쩍도 하지 않았다.

마을 이장이 다급하게 내 곁으로 다가와 “여보게, 어서 아버님 모시고 가게” 하고 말했다. 그때서야 나는 아버지가 측량대를 뽑아 흰 고무신발로 직신직신 밟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황급히 아버지의 팔짱을 잡아끌다 시피 하여 겨우 집으로 모셔왔다.

그날 저녁밥상 앞에서 갈퀴같이 메마른 아버지의 손이 처음으로 심한경련을 일으켰다. 도저히 수저를 집어들수가 없어서 어머니가 쌀죽을 끓여와 겨우 어떻게 저녁을 드시게 했다. 다음날 영례가 공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약을 몇 첩 지어왔고, 어머니는 뒤란에서 약탕관을 달였다. 갈포를 씌운 약탕기에서 새어나온 약재 버무린 냄새가 찢어진 창호지 틈으로 내 골방까지 스며들었다.

둥구나무 밑에 다다르자 어떤 노인네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담뱃대를 위아래로 저어 보였다. 나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노인네들을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병근이 자네 엄니가 아침나절에 여그서 얼마나 기다렸다고… 어서 올라가 보게”

둥구나무 밑둥아리에는 전봇대 두께만한 큰 버팀목 두 개가 양쪽에서 비스듬히 둥구나무를 받쳐주고 있었다. 내가 의아해하자 아까의 그 노인네가 덧붙였다.

“밑둥치가 다 썩어 은제 무너질지 알 수가 있어야제. 사람이 다칠까봐 우선 이렇게 받쳐 뒀다네. 섭섭하지만, 메칠 있다가 미리 밑둥치를 잘라내기로 했네. 넘어지기 전에."

나는 바삐 새마을 가게를 지나 고샅으로 접어들어 단숨에 공동 우물께까지 잰걸음을 쳤다. 거기서 오른 쪽으로 고샅을 꺾어 돌자 허물어진 토담 밑에는 질경이와 쇠비름이 무성했다. 내가 사립문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서자, 붕당에 서있던 마을 아낙네가 “오메, 아들왔네, 아들 왔어!” 하고 안방에 대고 소리쳤다. 문짝이 벌컥 열리며 눈두덩이 퉁퉁 부은 어머니가 마루로 뛰쳐나왔다. 어머니는 부리나케 내 손을 잡고 방안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손에 내 손을 꼬옥 쥐어 주었다.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했으나, 입술만 달그락거릴 뿐 아무 소용도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망막의 기능을 상실한 눈꼽낀 눈을 한 번 힘없이 감았다 떴을 뿐이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제방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날 목격한 아버지의 무서운 눈빛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 시름시름 앓고 있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냇둑으로 달려간 것은 지원 나온 군(軍) 불도우저 두 대가 새벽의 적막을 깨고 우렁우렁 굉음을 내면서 동구 밖을 돌아 제방 쪽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제방으로 건너가는 다릿목에 벌렁 드러누워 “날 깔아 뭉개고 가그라, 이놈들아!”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아버지는 흡사 미치광이마냥 두 눈을 부릅뜨고 무섭게 불도우저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환갑을 코앞에 둔 늙은 농부의 그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이글거리는 분노로 타올랐다. 그 눈빛에는 씻을 수 없는 원한 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수랑에서 구신 난다. 구신나!”

아버지는 황씨에게 뺨을 때리던 날 주문처럼 외던 그 말을 다시 반복 했다. 수렁은 삼각주로 된 그리 넓지 않은 평야의 모퉁이를 감돌아드는 곳에 움푹 패어 있었는데, 제방공사로 매몰되어 농경지에 편입될 구역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부르짖음이 소름끼치도록 오싹했다. 파견 나온 네 명의 공병대원들은 냇둑 밑에 야영텐트를 쳤다.

나는 아버지의 메마른 손바닥에 못박혀있는 굳은 살의 딱딱함을 감지했다. 쭈글쭈글한 아버지의 손은 석비레를 이룬 푸석돌마냥 금방이라도 쩍쩍 갈라져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슬며시 아버지의 손을 놓아 버렸다. 아버지의 손등에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져 방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 때 돌쩌귀가 빠져나간 뒤란 쪽 붕창문이 왈칵 열리며 영례가 고개를 쑥 들이 밀었다.

“어머머? 오빤 은제왔우? 어쩐지 안달이 나 못살것드라니, 흐흐흐….”

어머니가 모지랑비를 들어 봉창쪽으로 획 던졌다. 빗자루는 영례의 산발한 머리채에 가서 정통으로 맞았다. 영례의 몸이 갸우뚱 기울더니 쨍겅하고 몬 오지그릇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이구, 이 년아! 차라리 죽어라, 죽어!”

뒤란으로 돌아간 어머니가 억장이 받쳐 빗자루로 영례를 후려쳤다. 그리고는 골방으로 끌고가서 밖에서 문고리를 걸었는지 영례가 사납게 문짝을 걷어찼다.

나는 창연한 생각에 사로잡혀 금방이라도 방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이제 영례도 과년한 나이였다. 곰보쟁이 매파가 중매했던 청년은 읍내의 금은방에서 점원으로 일했었다. 혼사가 무르익어 겉사주까지 보내왔던 그 청년은 영례가 저 지경이 되자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따로 시계점을 차렸다. 어머니는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면서 영례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챘다. 기실은 참고 참았던 스스로의 설움의 봇물이 터져나온 것인지도 몰랐다.

그날은 영례가 야간 근무가 없는 날이었는데 귀가 시간이 늦어졌다. 아버지는 헛간에서 우걱뿔이 난 암소의 털을 글겅이로 빗어주고 있었다. 토방에서는 어머니가 풋바심한 벼를 키질로 까불고 있었다. 나는 이엉을 엮어 지네 형상을 본딴 토담위의 용마름에 손을 얹고 턱을 괸채 수렁 쪽을 바라보았다. 초저녁 그믐달이 칼코등이가 동강난 왜낫처럼 짤룩해 보였다.

공동우물 뒤쪽 대밭을 헤집고 다니며 도둑놈 잡기놀이를 하던 아이들이 수가 틀렸는지 저희들끼리 상스런 욕설을 주고받으며 싸워댔다.

한 아이가 엄지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집어넣어 뫼산 자 모양을 만들더니 꼴뚜기질을 치며 쏜살같이 달아났다. 남은 애들이 우루루 뒤쫓아가자 순식간에 주위는 고자누룩해졌다.

냇둑 밑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고 있는 공병대원들을 민박시키자는 청년회의 결의는 유야무야되었다. 우선 굴때장군같은 네 명의 장정들을 함께 숙식시키겠다는 마땅한 희망 농가가 나서지 않았다. 또한 장정들 스스로도 민박을 원치 않았다. 다만 늦가을 이후로는 야영이 어려울 것이므로, 그때 가서 여유 있는 농가를 돌며 번차례로 기숙하기로 일단 결론을 내렸다. 당분간 야영기간 동안은 계속해서 황씨네가 식사를 책임 맡기로를 했다.

그러나 엉뚱한 일로 좋지않은 소문이 퍼졌다. 불도우저 일이 끝난 장정들이 밤에 알궁둥이를 내놓고 목욕을 하는 바람에 냇둑으로 밤마슬 나간 처녀들이 질겁을 하고 쫓겨왔다. 한 번 그랬으면 장정들이 조심을 하거나 처녀들이 밤마슬을 안 나가면 될텐데 장정들은 그 뒤로도 아랑곳없이 벌거벗고 목욕을 했으며 처녀들은 참참이 바람을 쐬러 냇가에 갔다. 동네 노인네들이 혀를 끌끌 찼지만 제방공사를 착수한지 한달도 안돼 냇가에서는 이들의 희희낙락거리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근디 이 기집애는 어째 이리 늦는당가? 병근이 좀 나가보그라.”

잦은 동작으로 키질을 하면서 쭉정이와 꺼끄라기를 끌라내던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아버지는 보습과 따비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있었다. 암소는 등짝이 가려운지 헛간 벽에 기대어 자꾸만 비게질을 쳤다.

나는 사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공동우물을 지나 고샅길을 내려가는데 누가 토악질이라도 하는 듯 전봇대를 붙잡고 엉거주춤 쪼그려 앉아있었다. 발바투 다가가서 보니 영례였다. 영례는 어마지두로 화들짝 놀라며 “오빠…”하고 울먹이더니 내 무릎을 와락 움켜쥐었다.

버들가지 같은 개여뀌풀의 희끗희끗 한 털이 영례의 뒷머리칼 사이에 성깃하게 엉켜 붙어 있었다. 나는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니예요.” 영례는 간신히 대답하고는 어기적거리며 고샅을 걸어 올라갔다. 집에 들어선 영례는 “늦었어요.” 한마디만 내뱉고는 곧장 제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잠갔다.

“저 놈의 기집애 냉갈령스럽긴...”

어머니가 부엌벽에 키를 걸면서 언성을 높였다. 이튿날 내가 늦도록 일어나지 않는 영례의 방문을 열어젖혔을 때 영례는 손거울을 들어다보며 희희닥거리고 있었다. 영례는 깜짝 놀라며 거울을 내팽개쳤다.

“어머머? 깜짝이야. 아저씨 글지 마요. 글지 마요. 제발.”

영례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잔뜩 몸을 옹송그린 채 슬슬 엉덩걸음을 쳐서 방구석에 오그리고 앉았다. 나는 영례의 볼때기를 찰싹 갈겼다.

“호호호? 왜 때려? 왜 때려?”

어머니가 부엌에서 배추를 다듬다가 쫓아왔고, 아버지가 헛간에서 소여물을 썰다가 달려왔다. 나는 장승처럼 방 가운데 우뚝 버티고 섰다. 영례는 나를 매몰차게 올려다보며 키득키득 웃다가는 돌아서서 훌쩍훌쩍 눈물을 짰다.

어머니가 무명베조각으로 아버지의 등 밑에 고인 진물을 닦아냈다. 하도 오랫동안 자리에 누워 있어서, 자리에 닿은 살갗에 배긴 욕창이 터져 나온 것이다.

나는 다시 푸석푸석한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영례의 미친 기가 나타난 날, 아버지는 바로 이 손에 낫을 꼬나 쥐고 냇둑 밑의 야영 텐트로 치달았다. 서슬이 시퍼런 아버지의 기세에 질려 텐트에 남아있던 두 명의 대원이 상류 수문까지 줄행랑을 쳤다. 불도우저를 밀고 있던 다른 두 명도 뒤늦게 들판을 가로질러 읍내로 달아났다. 아버지는 야영 텐트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리고는 무엇인가를 찍어 내릴 듯 허공을 향해 낫을 높게 치켜들더니 불현 듯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모래밭에 푹 꼬꾸라졌다. 내가 아버지를 들쳐 업었고, 황씨가 뒤에서 부축해주었다.

제방공사는 근 보름간이나 중단되었다. 그런 사품에 지원 나온 불도우저도 철수해 버렸다. 마을 유지(有志)들은 회관에 모여 연일 대책회의를 열었다. 청년회 측에서는 관련자들의 처벌을 강경히 요구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한편 조속히 공사가 재개되도록 관계기관과 긴밀한 협조를 갖기로 결정을 보았다.

줄곧 침식을 잊고 아랫목에 누워 멍한 시선으로 천장만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던 아버지가 하루는 밤늦게 후딱 일어나 헛간으로 가더니 날이 예리한 동가리톱을 들고 나왔다. 공사가 재개되어 내일이면 새로 교체된 공병대원들이 불도우저를 끌고 오게 되었다는 이장의 새마을방송이 있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김맬 때 신던 목이 긴 장화를 꺼내 신었다.

“논배미 좀 둘러보고 오마.”

아닌 밤에 홍두깨같은 말을 남기고 아버지는 휘척휘척 걸어서 고샅을 내려갔다. 토담을 덮고 있던 호박넝쿨에는 제 무게를 견디기 못해 땅으로 넌출진 청둥호박이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밤이슬을 맞고 있었다. 영례는 언죽번죽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호박꽃을 따서 질겅질겅 씹으며 제방으로 내달았다. 어머니는 치마의 중동끈을 잡아매며 그런 영례의 뒤를 빗자루를 들고 쫓아다녔다.

나의 입영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몸서리치면서 그 날을 기다렸다.

밤마다 나를 엄습해 오는 무형의 손길들에 옭매어 나는 숨을 컥컥거리며 수렁으로 끌려가는 무서운 꿈만 꾸었다. 안개가 가득히 낀 수렁가에 닿으면, 내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회색빛의 낯선 사람들이 무표정하게 똑바로 앞만 쳐다보며 수렁 깊은 곳을 향해 다리를 절며 걸어갔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지만, 빈번히 그들은 손사래를 치면서 나는 따돌렸다. 그래도 몰래 걸음을 옮겨놓는 내 가슴으로 부드러운 새의 깃털이 날아왔다. 날아온 깃털은 이내 파릇한 죽순으로 변해 있었다.

아버지는 한식경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쇠약해진 아버지의 몰골은 솔보굿 마냥 거친 비늘이 돋았다. 아버지는 톱을 헛간에 집어 던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덜컹덜컹….

밤새 영례는 간헐적으로 방문고리를 흔들어댔다. 날이 밝자 우렁우렁한 굉음을 내며 불도우저가 동구 밖을 돌아왔다. 잠시 후, 제방 쪽으로 향하던 선두 불도우저가 다릿목을 지나는 순간 교각이 무너지며 개울에 모로 처박혀 버렸다. 다행히 운전병은 경미한 찰과상만을 입는데 그쳤지만, 불도우저를 끌어올리기 위해 기중기가 동원되는 등 하루 내내 큰 소동을 빚었다.

나무로 만든 다리라지만, 위에 철판을 까고 두껍게 흙을 덮어 불도우저의 중량을 충분히 견딜만한 튼튼한 다리였는데 왜 다리가 무녀 졌는지 모르겠다고 마을 사람들은 미심쩍어했다.

나는 불도우저가 끌어올려진 후 파헤쳐진 다릿목에 나가 보았다. 개울은 진흙과 뻘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반 아름이나 되는 두 개의 뭉툭한 통나무 교각 밑둥이 톱으로 절반쯤 켜져 있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눈 여겨 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는 아랫목에 누워 “수랑에서 구신 난다. 구신나!” 열에 달뜬 목소리로 웅얼거리기만 했다.

불도우저가 다시 힘차게 냇둑을 밀어붙였고, 서서히 수렁은 메꾸어져 갔다. 아버지는 말문을 닫았다.

언젠가 비가 오던 날 아버지는 혼자 수렁에 나갔다. 아버지는 혼을 건진다고 훠이훠이 누군가를 불렀다. 자세히 들어보니 ‘장근이 어멈…’이라고 부르는 것이었고, 점차 기진해지자 ‘장근아…’ 하고 부르며 수렁 가 억새풀 숲에 주저앉았다.

장근이형은 나의 이복형인 셈인데, 세살 때 어머니의 품에 안겨 수렁 속에 산매장되었다고 했다. 장기간 상류의 수문을 막아놓았던 터라 수렁마저 뻘겋게 드러나 보였을 때의 일이었다.

마을 청년 몇 명이 숨어있던 뒷산 동굴로 죽창을 든 무리들이 떼지어 몰려와 청년들을 오랏줄로 묶어갔다. 아버지는 그날 식량을 구하러 나갔다가 화를 면했다고 했다. 그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와 네남편이 도망갔으니 대신 죽어라며 장근이 어멈을 끌고 나갔다. 장근이가 울어대자 어멈 품에다가 강제로 안겨 데려갔다. 다음날 그들은 수문을 있는 대로 다 열어놓고 도주했다. 세상이 조용해진 후 다시 수문을 막고 수렁을 파 보니 끔찍하게 뼈들만 서로 엉켜있더라고 했다.

“니 엄마 본남편도 그 때 변을 당했응께.”

아버지는 곰방대를 놋재떨이에 툭툭쳤다. 그 이야기를 들려줄 때의 아버지 얼굴에는 대번에 등잔 심지만큼이나 굶은 핏발이 선명하게 돋아났고, 어느새 두 주먹은 불끈 쥐어진채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물론 그 이야기는 아버지가 일부러 꺼낸 것은 아니었다. 영례의 혼사문제로 곰보쟁이 매파가 들렀던 날, 죽은 장근 어멈과의 혼담이 오가던 때의 자신의 경험을 늘어놓다가, 속으로만 중하게 뭉쳐두었던 한스런 기억의 실토에서 몇 가닥의 실올이 우연히 풀려나오것에 불과했다.

“아이구, 영감!”

갑자기 어머니가 단근질 같은 울음을 토해내며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버지는 상체를 한번 크게 들먹이더니 영원히 멎지 않을 성 싶은 긴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의 손은 아까부터 차갑게 식어갔다. 나는 아버지의 팔을 몸체와 가지런히 폈다. 평소 굴신이 자유롭지 못했던 터라 뼈마디는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염습을 하기위해 어머니는 울면서 아버지의 생시옷을 벗겨냈다. 나는 이빨을 앙당문채 오열을 삼켰다. 밤에 입관을 마치고 나니 황씨가 최초로 문상을 왔다. 황씨는 “선친께서 나를 얼마나 원망하셨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네.” 그러면서 <수리조합직원일동>이라고 명기된 부의금을 전달했다. 나는 헐렁한 굴건이 안면을 가려서 산사코 위로 치켜 올려야만 했다. 황씨가 돌아간 후, 나는 상주임을 망각하고 어혈진 도깨비 개천물 마시듯 탁주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심야에 영례가 골방에서 뛰쳐나와 관을 가린 병풍을 넘어뜨렸다. 나는 영례의 산발한 머리칼에 짚으로 엮은 수질(首絰)을 얹어 주었다. 영례는 수질을 벗어 빙빙 돌려 보더니 병풍쪽에다 휙 던져 버렸다. 촛대에서 촛농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밤은 어머니의 흐느낌으로 자지러졌다.

아버지의 삼일장(三日葬)을 치른 다음날 오후, 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곡동 마을을 떠났다. 동구 밖을 돌아 나올 때, 마을 사람들이 동구나무 주위에 새끼를 쳐놓고 굵은 동밧줄로 뭔가를 묶고 있었다.

아버지의 상여를 메었던 청년들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동밧줄을 잡아 당겼다. 속이 텅 빈 동구나무는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우지끈 소리를 내며 쿵 무너졌다.

상행열차에 몸을 실었을 때, 나는 문득 형체도 없이 철거되어 버렸을 목조건물에서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어디쯤 왔을까, 깜빡 졸다가 깨어보니 어느새 창밖엔 어둠이 내렸는데, 멀리 산골 마을에는 외로운 등불 하나가 깜부기불처럼 미동도 없이 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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