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사건을 계기로

경찰의 責任(책임)만은 아닌 社會病理(사회병리) 문제

편향보도는 黑白論理(흑백논리) 유도

 

1

일상생활의 조그마한 일부터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까지 가만히 안방에 앉아서도 접할 수 있는 현대인은 가히 매스미디어의 범람 속에 살고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등에 의존해 生活(생활)하고 있다. 때문에 대중매체는 대중에게 바르고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필요성이 있으며 더 나아가서 올바른 언론 창달에 이바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 정보가 그릇되고 오도 되었을 때, 대중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뿐더러 사회의 독소 같은 작용을 하게 된다.

2

의령의 마을 주민 쉰다섯 명이, 그것도 주민을 보호해야할 경찰관에 의해 살상되었다는 급보가 전해졌을 때 도저히 믿기지 않아 두 번 세 번 거듭 확인해보고서야 ‘그렇구나’ 할 수 있었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사고였다. 의구심과 착잡한 심정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신문을 살펴보았지만 명쾌한 해답을 못 얻었을 뿐만 아니라 꼭 같은 내용을 보도하고 기사화하는데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가족과 모든 이들의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에 우순경에 대한 감정적인 태도에서 탈피하여 좀 더 이성적인 자세를 갖자는 소리가 자못 거역스럽게 들릴런지는 몰라도, 단순히 이 참사를 한 개인에게 ‘狂人(광인)’이라는 낙인을 찍어 책임을 우발적인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에는 매우 심각하고 깊은 문제가 숨어있고 우리의 사고를 흑백논리로 가져가게 하기 쉬운 점이 있다.

사람을 쉰다섯(경찰발표에 따르면)이나 죽였으니 미친者(자)요, 나쁜者(자)이고 사회에서는 불필요한 인간이라는 식의 말은 극히 위험스러워 보인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한다면 쉰다섯 명을 죽인 책임은 전적으로 경찰과 한 미치광이에 있으니 ‘그들은 모두 필요 없는 사회악’이라고 말하는 태도는 있을 수 없는 문제이다. 다음과 같은 기사내용은 이번 사건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준다. “경찰은 도대체 이 여섯 시간 십분 동안 무얼 하고 있었는가. 어떤 조처를 취했는가. 마을마다 조직된 예비군은 어떤 역할을 한 것인가.” 이 사건 보도를 접한 국민 모두의 반응이 컸다.

일종의 추측기사이다. 미처 감정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이것이 국민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며 사상의 폭이라는 결론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당황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이 조심해야할 흑백논리이다. 즉, 경찰은 우순경의 행동에 대하여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니 국민들은 모두 울분을 느낀다는 것이다. 기사에 대한 사실 자체를 부정하려함은 결코 아니다. 시민의 안전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야할 경찰들이 자신들의 몸만 생각함은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될 수는 없다. 다만, 이 사건이 경찰만의 책임이라는 단정을 내리기에는 너무나도 사회적인 병리가 짙게 깔려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회적인 병리이고 또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또한 그 해결점은 무엇인가? 등등 여러 문제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숱한 물음에 대해, 이 사건의 근본적인 뿌리를 찾고 해결점을 발견하여 극복하기 위해서는 원점에서 다시 이 사건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우순경을 간단히 ‘狂人(광인)’ ‘殺人魔(살인마)’라고 하는 식의 도식적인 글귀에서 이미 그 심층에 깔려있는 내면을 겉으로 들어내기 위한 작업의 50% 이상을 방해하고 있으며 국민들에게 사건을 생각하게 할 여유를 주지 못했다. 마치 꽃을 보고서 나무를 보지 못함과도 같다. 이와 같이 겉포장에만 매달려 그 속의 내용물을 생각해보지 못한 결과 다음과 같은 극단적인 사태로 발전하게 된다.

“우순경의 만행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극적인 보기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인간이란 잔인성이라는 부정적인 면에서도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우순경이 狂人(광인)이라는 사실에만 조명을 맞추다 보니 그의 행동은 말 그대로 만행일 수밖에 없지만 그의 만행이-그것도 부정적인 측면에서, 인간 행위의 표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는 인간은 모두 잔인하다는 따위의 얘기로 전락해 버리고 사건의 초점을 흐리게 한다.

이점은 그래도 사건의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기나 하지만 우순경의 狂亂(광란)이 세계적이다,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켰다라는 따위에 와서는 사건의 실체조차 불분명해 그의 행동이 마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10개쯤이나 딴 것처럼 그를 우상화시켰다. 이외에도 꼬집어 내려면 한이 없겠지만 그것이 이 글의 의도도 아니고, 또 대중 매체를 탓하자는 바도 아니기 때문에 이를 접어두고 의령사건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가 추적하여 보고자 한다.

3

偶像(우상)이란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언젠가 모 잡지에서 ‘김치와 고추장이 딴 식품에 비해 비타민과 철분이 더 많고 또 무엇이 더 많다.’ ‘영양가를 분석하면 이거야말로 세계최고의 식품….’ 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본적이 있다. 이 책에서는 물론 보편과 특수성에 근거를 둔 지적하여 쓰긴 했지만 여기서도 偶像(우상)이 뚜렷하게 보여진다. 한 문화권의 독특함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자기의 문화만이 우월하고 좋다는 결론은 출발부터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상이 갖고 있는 유혹은 우리의 사고를 고철 덩어리로 만들곤 한다. 따라서 우상은 깨져야만 한다.

禹(우) 순경의 중•고 때의 성적과 생활 기록부에서 그에 대한 단서가 될만한 점을 발견 할 수 있다. 고교 1학년 때의 기록은 ‘유연성이 없지만 착실한 편’, ‘안정되어 있지 못하다’로 기록되어 있고 그밖에도 중학교의 기록을 보면 ‘착실한 편’이라고 한다. 우리가 한번쯤 생각하게 되는 것은 1학년과 2학년의 생활 기록부에서 오는 차이다.

남과 같이 살아오던 우순경은 고교 2학년에 이르러 아버지가 병이 돌자 그의 性格(성격)은 급속히 변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단 여기서 이 사건 속에는 환경적인 요소가 짙게 깔려 있다는 암시를 받을 수 있다.

한 개인의 행동이 밖으로 노출되기 까지는 그가 갖고 있던 주변 환경, 즉 사회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이다. 맹자의 어머니도 3번씩이나 장소를 옮기면서까지 맹자를 공부시켰다는 말도 있지만, 우순경도 ‘狂人(광인)’이란 낙인이 찍히기 까지는 가족•친구•사회 등의 환경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論議(논의)의 원점으로 돌아가 우순경이 광인이라는 사실은 그 개인 뿐 아니라 가족•사회의 集團(집단)에도 그 책임과 비극이 同存(동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순경의 행위를 단순하게 “미친놈, 정신착란증세가 저지른 비극이다.”라고 성급히 단정하기에는 왠지 부끄럽고 낯이 뜨겁기만 하다. 이런 것을 두고 세계적이라는 식의 운운은 자기얼굴에 침을 뱉어도 여러 번 뱉는 격이다.

狂人(광인)의 행위를 탓하기 이전에 왜 그와 같은 일이 발생되어야 했으며 그 사후 대책은 무엇인가라는-社會(사회)가 한 개인의 행동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반성 할 줄 아는-이성적인 태도가 앞서야 할 것이다. 미친놈의 소행이었기 때문에 또 다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반문보다는 오히려 얼마 전에 김대두가 있었고 부인을 토막 살해한 남편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4

의령의 慘事(참사)가 보여주는 사회의 부조리의 극단적인 면은 민주주의가 다분히 道德的(도덕적)이요, 論理的(논리적)이라는 측면에서 보아질 때, 인간 경시의 물질 중심의 사회적, 교육적 풍토에 뿌리박고 있던 구조적인 병리의 하나가 표출된데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모순을 깊이 느끼고 통찰하여 그 근본적인 문제-사회 불평등, 토론을 통한 비판적 교육관의 확립 등을 해결하는 길만이 우리의 文化(문화)가 발전하게 되고 제2의 우순경과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게 될 것이다.

이성이 숨쉬어야 할 사회에 정작 이성은 통하지 않고 충동적인 감정과 폭력만이 난무한다면 과연 내가 설 곳은 어디며 이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지 우울하기만 하다. 끝으로 우리는 일말의 책임을 느끼면서 무고하고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의 넋을 애도해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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