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지훈문학상 수상자 윤제림 동문 - 그의 삶 자체가 한편의 시(詩)

▲ 윤준호 교수(필명 윤제림)

윤준호 교수(필명 윤제림)의 첫 느낌은 유쾌했다. 마침 약속이 점심시간이라 서울예술대학 교내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도 마주치는 모든 학생들과 살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친근한 분위기였다. 그는 점심식사를 함께하는 동안에도 말을 건네주었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시인 구상과의 운명적 만남
윤 교수가 처음 시를 쓴 것은 동국대학교에 입학해서였다. 국문과 신입생 백일장 장원작품이 그의 첫 번째 시다. 문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학창시절 시인 구상 선생과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윤 교수는 인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구상 선생의 문학 강연회에 참석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죽은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요?”
구상 선생의 이 한 구절은 그의 마음에 꽂혔다.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화두같이 큰 질문이지. 이런 큰 문제를 푸는 것이 문학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고, 시를 써야겠다, 국문과를 가야겠다,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가야겠다. 그렇게 결심했지”
그 시절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는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곳이었다. 그는 “서정주 시인, 양주동 박사를 비롯한 쟁쟁한 분들에게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어. 이를테면 고대 법대, 연대 상대와 같이 동대 국문과는 간판이었지”라며 대학교 시절을 회상했다.
이런 저런 학창시절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떤 대학 생활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범생이는 아니었지. 수업도 많이 빼먹었지” 그의 말에 의하면 지금 제일병원 옆 아파트가 당시는 막걸리 집이었다고 한다. “어떤 날은 학교 교문 문턱도 밟지 않았어(웃음) 그런 날은 막걸리만 먹고 집에 가는 거지”라며 요즘 학생들의 여유 없는 생활이 안타깝다고 했다. “군사 독재 시절이어서 허망세월이긴 했어도 멋이나 낭만을 찾을 시간은 있었다”는 윤 교수의 말을 들으니 동경의 마음이 들었다. 그의 대학시절 추억엔 대 시인들의 모습이 생생했고, 낭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 모든 장면이 시가 되다 
윤 교수는 여행, 사람, 책 등 모든 삶의 장면이 시의 소재가 된다고 했다. 그의 시집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시 두 편에 대해 물었다.
“이 세상 많은 얼굴 중 왜 ‘새의 얼굴’ 인가” 라는 우문에 그는 “새의 얼굴을 택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새소리가 들렸다”고 답했다. “화엄사 아래의 산장여관 같은데 들어서 밤잠 못 들고 뒤척이는데 새 소리가 들리더라. 처음 듣는 슬프기도하고 아름답기도 한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어떻게 생긴 새가 저런 노래를 부를까 생각했다”며 새와 시인이 겹쳐지고 새의 노래와 시인의 시가 오버랩된 것이라고 말했다.
“미당의 숙제도 실화야, 실화”
실제로 2학년 때 서정주 선생의 시창착론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미당의 숙제’는 그 당시를 회상하며 쓴 것이다. “미당 선생이 어느 날 수업을 오셨는데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은 날이었어. 출석을 부르시더니 ‘오늘은 날씨가 좋구머언~ 나가서 시 한편씩들 쓰지~ 그럼 오늘 수업은 이만’ 하시면서 교실을 나가셨지. 대 시인은 다르다고 감탄했다”며 행복한 얼굴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나갔다. 서정주 시인에게 무엇을 배웠다기보다는 대시인의 육성을 듣는 것, 눈을 마주치는 것, 그분의 행동을 보는 것 자체가 황홀했다고 한다.  

카피라이터 윤준호와 시인 윤제림
“고등학교 국어선생으로 몇 달 있었는데 재미가 없더군. 그만두고 얼마간 놀고 있었지. 그러다 어느 날 지인의 소개로 광고회사에 들어갔지. 광고회사가 뭔지도 모르고 들어갔어. 우리나라 최초의 광고회사인 오리콤이었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시를 쓰던 그가 카피라이터 윤준호가 되기까지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 당시 일반인들은 광고회사의 존재도 몰랐을 때라고 한다. 그렇게 83년 오리콤에 입사해 93년까지 10년을 카피라이터로 생활했다.
어느 날 ‘내가 왜 이런 글만 쓰고 있지?’라는 회의감에 다시 시를 썼다고 한다. 카피라이터로 활동하면서 87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근본적으로 다른 시와 광고카피 창작을 병행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냐고 물었다. 이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대신 프리랜서로 활동 할 때 홀로 쓰는 작은 방에도 책상 두 개를 둘 정도로 철저하게 구분했다”고 답했다. 한 쪽은 시인 윤제림이 앉았고 다른 한 쪽은 카피라이터 윤준호의 자리었다.

지훈 문학상이 어떤 의미인지 묻는 질문에 윤 교수는 남다른 자부심이자 인연이라고 답했다.
그는 “조지훈 시인이 고려대의 상징 같은 분으로 기억되지만 사실 동국대학교 전신인 혜화전문을 졸업하셨다”며 “조지훈 시인은 누구나 존경할 만큼 흠결 없는 분이고 그분의 이름으로 된 상을 받는 것은 스스로 자랑스러울 수 밖에 없다”고 조지훈 시인에 대한 존경을 나타냈다. 
“무엇보다 간절한 소망은 제 시의 값이 제 ‘밥값’에 부족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지훈 문학상 수상소감 중 한 구절이다. 그는 앞으로 ‘밥값’하는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도 “내가 게을러 큰 욕심 없어. 그저 아이들 가르치는 날까지 좋은 선생하고, 좋은 시 두어 편쯤 남겨놓고 죽으면 되지 뭐”라며 담담하게 답했다. 시를 쓰는 일은 평생 해고당할 일 없는 직장이라는 윤제림 시인. 앞으로도 그가 느끼는 세상을 몇 편의 시로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아 행복하다.

윤준호 교수(필명 윤제림)는 국어국문학과 77학번으로, 문예중앙 시 ‘뿌리 깊은 별들을 위하여’로 등단했다. 87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수상했고 올해 5월 제 14회 지훈문학상을 수상했다. 83년부터 10년 동안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활동했다. 2003년부터 서울예대 광고창작과 교수로 재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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