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꿈과 희망을 찾고 있을 미국의 송어낚시에게

▲ 미국의 송어 낚시(Trout fishing in America) / 지은이:리차드 브라우티건 / 옮긴이:김성곤 / 펴낸곳:비채 / 15,000원 / 296쪽

“이것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존재, 미국의 송어낚시에게 보내는 길고 긴 잡담 내지 편지 한통입니다. 조만간 다시 뵈었음 싶군요.”

안녕? 내게는 예전부터 무슨 자격지심처럼 큰 바람 하나가 있었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뭐 그런 내용이야. 물론 서둘러 죽어 흙으로 돌아가자 라는 비극이나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과는 거리가 있어. 막연한 자연숭배사상이랄까? 누군가 종교를 물으면, 제 종교는 자연입니다라는 뜬금없을 답을 날리곤 했단 말이지. 지금은? 도시인으로서의 삶만을 용케 끌어안고 달음박질 중이야. 들이쉬고 내쉬는 공기 정도만이 고마운 자연의 감흥인 수준? 그러던 중 너를 만나게 됐어.

책 한권의 형태를 하고 있는 너는 ‘미국의 송어낚시’란 이름표를 달고 있었어. 부제에 순간 매혹당하는 심정이란 건 꽤 강렬했지. ‘사라진 꿈과 희망을 찾기 위해 떠나는 송어낚시 여행’이라는. 간절했으나 설명키 힘들었던 내 안의 신앙 한 조각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 같은 게 있었는지 몰라. 리처드 브라우티건이란 생소한 작가를 알아봤어. 굶주림에 교도소밥이라도 먹어보겠다고 경찰서에 돌을 날렸다는 기행이나 미국의 반문화운동을 주도했다는 소개가 이어지더군. 1967년 너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 전 세계의 관심을 받았다고 하는데,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이 너를 성서처럼 들고 다녔다지? 달에서 최초로 가져온 운석을 ‘미국의 송어낚시 쇼티’라고 명명했다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었어.

당시 사람 들은 네가 담고 있다는 강렬한 반체제 정신, 기계주의와 물질주의 비판, 목가적 꿈을 상실한 현대인의 허무감 등에 매료되었다더군. 맞아! 목가적인 꿈!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 오랜 바람을 실현했을 전문가의 여정에 동반할 수 있단 설렘이 클 수밖에.

47개의 에피소드가 파편처럼 혼재된 생소한 구성에 대한 거부감을 누를 수 있었던 건 네가 소설에 속했기 때문이야. 또렷한 서사를 기대했던 거지. 그게 첫 번째 읽기에서의 큰 실수였어. 미국의 송어낚시인 네게 대사가 주어지는 대목이 있잖아? 네 이름은 그저 주인공이 미국 전역을 떠돌며 송어낚시를 한다는 행위 자체라 확신하고 있었어. 그런 네가 어떻게 말을 해? 또 다른 대목에선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와 저녁오찬 중인거야. 일개 책 제목인, 송어낚시 여행이라는 행위에 불과할 네가 말이지. 계속 참으며 편지, 광고문, 주석 등 형태의 생소함 그리고 앞뒤 뒤엉킨 혼란스러움을 눈에 우겨넣어버렸어. 마지막 장을 덮고 뭐가 남았는지 알아? 낭패스러움뿐이었지. 네 이름에 대한 어떤 해석조차 해내지 못했다는 자책 따위였어.
두 번째 읽기가 시작됐고 공감 되는 부분이 생겨나더라? 송어하천과 함께 나무, 새, 꽃, 곤충 등을 판매 중인 점원과 흥정하는 광경이 묘사되잖아. 화자는 조각난 상품으로 진열된 자연과 마주하게 되지. 동물이라고 남아 있는 게 고작 수백 마리의 쥐떼 정도라는 대목에서는 파괴된 자연에 대한 슬픔도 알아챌 수 있었어. 누더기 천 조각으로 감춰진 숲과 송어하천을 발견하고 느꼈다는 상쾌함이란 게 어쩌면 물질주의로 철저하게 파편화된 자연 내지 목가적 풍경에 대한 갈구를 풍자하는 거라 느껴지기도 했어.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너는 그냥 은유 내지 상징일 뿐이라고. 기계화된 문명에 절여져 살고 있는 우리들이 놓친 무언가인 거지. 인간이 자연과의 어우러짐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상실한 피조물로서의 심성 그 자체이자 목가적인 풍경으로의 회귀를 위한 수단일까 싶었어. 그러니 고정된 형태 없이 모래상자, 아이, 책이나 음악, 쇼티라는 이름의 누군가 등으로 옮겨 다니는 거야. 작가는 무형식의 형식을 통해 여러 편의 시를 쓰듯 상상하고 중얼거릴 뿐이었어.

세 번째 읽기에서는 은유나 상징의 실체를 캐내지 않으려 했고, 시를 읽듯 한 땀씩 글 사이를 이어만 갔어. 몰이해는 여전했지만 여러 대목들이 아름답게 잡히는 거야. 늦은 밤, 낮게 차오르는 나무내음과도 같은 누군가의 상념이라면 왠지 수긍할 것 같은 기분이었어. 그러다보니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는 거야.

송어가 뛰어 오르는 맑고 차가운 물줄기가 곁에 있는 듯했어. 어쩌면 지금 미국의 송어낚시 네 저변에 흐르고 있는 파괴와 폭력, 황폐함에 대한 상징이려나? 죽은 물고기, 시체, 총과 같은 죽음의 상징들이 눈에 띄기도 했지. 너의 조물주인 브라우티건씨는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했다지? 왠지 그 자살과 네 곳곳으로 넘치는 죽음의 분위기라는 게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나 싶더군. 서구문명에 의해 파괴된 태곳적 자연에 대한 향수, 그런 공간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싶지만 불가능해져버린 누군가들의 슬픈 좌절을 노래하는 듯싶기도 했어.

자신의 머리에 총을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중인지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현대인의 삶을 비아냥거리거나, 여러 예술행위가 가져오는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 보이기도 하고, 살인자의 속내를 한 채 송어낚시를 갈구한다는 위선자들의 끔찍함에 부들거리는 떨림 같은 것도 보이는 듯싶었어.

현실이 ‘자연과의 조화를 깬 왜곡된 인간들의 현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좌절이나 죽음 등’으로 대변된다면, 동경할 지점엔 ‘우리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태적인 조화와 균형을 되찾아야 하고 그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놓여 있는 거지. 브라우티건씨는 미국의 송어낚시라는 거대하고 포괄적인 은유와 상상을 통해, 그 양쪽인 현실과 동경 자체를 표현하기도 하고, 그 둘을 이어버리거나 틈을 메운 셈이라고 하면 되려나?

솔직히 정확한 답을 얻진 못했어. 왜 네가 중요하며, 네게로 돌아가야 하는지, 대체 네 정체가 무언지 제대로 알지 못해. 막연하게 끄덕끄덕 동의하는 거지. 그럼 여태의 주절거림은 무어냐고? 음... 누군가 네게 다가가려 한다면 달려가기보다는 가벼운 심호흡으로 음미하듯 다가가라는 그런 얘기가 하고 싶었던 건가 봐.

이젠 너를 놓으려고 해. 시간을 슬쩍 지나보내고 다시 찾아보려고. 그땐 지금보다는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때까지 난 내가 살고 있는 한국에서의 희망이 될 붕어 낚시라도 찾아봐야지 싶다.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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