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죽음이 언제 찾아온다고 생각하고 수행하느냐?’고 물었다. 한 제자는 오래 산 사람의 예를 들어 60년쯤 뒤에 온다고 했다. 또 어떤 제자는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죽은 사람의 예를 들어 한 달쯤 뒤에 온다고 했다. 또 누구는 이레 뒤에, 엿새, 닷새, 나흘, 사흘, 이틀, 하루 뒤에 온다고 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고개를 흔들며 말씀했다.

“아니다. 그대들은 모두 죽음이 오는 때를 모르고 게으른 수행자다. 죽음은 그렇게 천천히 오지 않는다. 죽음은 호흡지간에 찾아온다. 그래서 저 박카리 비구는 호흡지간에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숨길 드나드는 곳에 생각을 매어두고 그 숫자를 헤아리며 수행했다. 그대들도 이렇게 호흡지간에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수행해야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 고통, 번민에서 헤어날 수 있다.”

증일아함 35권 칠일품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경전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돌아보면 우리 주변에 널린 것이 죽음이다. 눈만 뜨면 이러저런 자연재해나 대형사고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를 듣는다. 장례식장에 가보면 영안실이 모자랄 정도로 죽은 사람들이 넘쳐난다. 아침에 대문을 나섰다가 저녁에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내 친구일 수도 있고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실로 호흡지간에 이승과 저승으로 엇갈리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이렇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게 죽음이라면 우리는 매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승과 저승이 호흡지간인 데도 끝까지 미워하고 질투하며 살 것인가 사랑하며 용서하며 살 것인가. 남을 누르고 빼앗으며 살 것인가 도와주고 나누며 살 것인가. 백년도 못살면서 천년을 살 것처럼 욕심 부릴 것인가 혹시라도 잘못한 일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사과할 것인가.

지난번 세월호가 침몰할 때 고등학생들이 가족에게 보낸 문자가 가슴을 친다. “엄마 말 못할까봐 문자 보낸다 사랑해” “누나 그동안 잘 못해줘서 미안해 사랑해 엄마한테도 전해줘”

이 짧은 문자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미안한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미루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매순간 진실을 고백하며 사는 것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일상 속의 수행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 수행을 하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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