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무대를 떠나게 된 김승현 동문

우리대학 출신 김승현(체육교육 01졸)이 코트를 떠났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은퇴 결정. 여러 가지 상황들이 발목을 잡았다.

지난 시즌 부로 FA자격을 얻은 김승현은 서울 삼성과의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결국 작별을 선언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의 퇴장에 많은 아쉬움들이 지나간다. 

글쓴이는 대학시절 김승현과 마주 앉은 바 있다.

동대신문 인터뷰를 통해 만난 김승현은 당시 2011년 서울 삼성에 복귀한 지 1년이 지난 후 새로운 도약에 대한 설레임을 이야기했다.

많은 굴곡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전 소속팀에서의 잦은 부상과 불운이 앞날을 어둡게 했지만 좋은 환경이 조성된 삼성에서 자신의 부활을 자신했던 김승현이었기에 아쉬움은 더욱 컸다.

김승현은 정말 혜성처럼 등장했다. 2001년 대구 동양 오리온스에 전체 3순위로 지명된 김승현은 처음으로 프로무대를 밟는다.

그가 다니는 코트 위에는 창조성이 꽃피기 시작했다. 일명 ‘노-룩(No-Look) 패스’. 직접 보지 않고 패스하는 기가 막힌 장면들은 그를 더욱 빛나게 했다. 뛰어난 패스를 바탕으로 김승현은 마르커스 힉스 등과의 기가 막힌 콤비플레이로 오리온스의 새로운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후 2004-2005시즌에는 평균 1.5개의 어시스트, 역대 최다 기록을 세우며 최고 도우미로 떠올랐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에 기여, 한국 농구의 대표격 스타로 등극했다.

영원한 비상은 없었다. 김승현에게도 불운은 밀려왔다. 2006-2007시즌을 기점으로 악재들이 겹쳤다. 오리온스와는 이면계약 파문이 일었고 2년 동안 운동을 쉬어야 했다.

2011년 삼성에 복귀했지만 공백기와 목디스크 부상은 화려한 복귀를 어렵게 했다.

그래도 김승현은 김승현이었다. 클래스는 영원했다. 지난 시즌까지 삼성에서 뛰며 여전한 패스 감각을 선보이며 팀의 맏형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제 더 이상 코트의 마법사, 김승현은 볼 수 없다. 혹자들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하는 천재가 떠났다고 한다.

한국 농구에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높이보다는 가드진에 심혈을 기울였던 2000년대 초반 김승현은 그 선두주자에 있었다.

김승현의 은퇴와 함께 새로운 스타 가드들의 등장을 주목해야 할 이유도 생겼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천재의 등장을 기다려야 하는 순간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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