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를 깨닫다

▲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왼) / 바투동굴로 올라가는 272개의 계단(오)

점심시간,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오빠 저 말레이시아에 잘 도착했어요. 그런데 정신이 없네요 ㅋㅋ.” 지난해 세계여행이 끝나고 주최했던 나눔 강연에 온 친구다. 그 때 자기도 세계여행을 꼭 떠날 거라며 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본다고 번호를 가져간 게 엊그제 같은데, 21살의 이 어린 여자 친구는 지금 세계여행 중이다.

눈을 뜨니 어느새 6시간이 흘렀다. 비행기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상공을 날고 있었다. 잠시 후 비행기의 긴장되는 착지과정이 있고(사실 필자는 비행기 공포증이 있다), 쿠알라룸푸르 공항에 들어서게 된다. 비행기 문을 나와 입국 심사대로 향할 때의 첫 느낌은 전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각기 다른 피부색의 사람들,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언어들 그리고 전통 의상을 입은 인도인들까지, 눈이 가는 곳 어디든 새로운 것들 천지였다. 그렇게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걸어가 입국 심사 줄에 서게 되었고 기나긴 줄의 끝에 여권 도장을 찍어주는 직원이 보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두터운 콧수염 그리고 부리부리한 눈까지, 맞다 여긴 말레이시아다. 차례가 다가올수록 점점 긴장되기 시작했다. 저 직원이 뭐라고 물어볼지 그럼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혼자서만 한 20개 정도의 문답은 생각해놓았던 것 같다. 결국 내 차례가 다가왔고 여권을 내민 뒤 긴장한 얼굴로 영어 listening 시험을 기다렸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여권에 도장을 찍어준 그 직원은 나에게 딱 한마디만 했다.

“Welcome to Malaysia~!”

그렇게 여행의 첫 번째 관문은 너무나도 쉽게 나를 통과시켜 주었다. 쿠알라룸푸르 시내로 들어가 본 첫 인상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높게 솟아있는 KL 타워는 우리네 남산타워와 비슷했고, 쿠알라룸푸르의 상징으로 불리는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는 63빌딩과 비슷했다. 그래서 딱히 도시의 풍경에서는 느껴지는 게 없었는데, 우연히 숙소에서 새로 사귄 중국인 친구들의 추천으로 바투 동굴이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이곳은 힌두교의 신들을 모신 곳인데, 272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커다란 동굴이 나오고 그 안에 힌두 신전을 지어놓은 곳이다. 이곳의 또 다른 특징은 힌두 신전까지 가는 길에 엄청난 수의 원숭이들이 시비를 걸어온다는 것이다. 역시 어디든지 신을 만나기 위해선 시련과 고난을 극복해야 하는 것 같다.

바투 동굴로 향하는 길, 나는 평소 들고 다니던 봉지 가방을 들고 갔다. 여기서 봉지가방에 대해 잠시 설명하자면, 마트에서 간단히 구할 수 있는 봉지다. 나는 이 봉지에 카메라부터 시작해 지도, 과일, 돈까지 다 넣고 다녔는데, 여기에 중요물품들을 넣고 다니면 아무도 뺐을 생각을 안했다. 심지어 깜빡하고 자리에 놓고 가도 아무도 가져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런 봉지 안에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 못하는 듯하다. 그래서 여행 내내 쓸 만한 봉지가 생기면 새로 갈아주면서 들고 다녔고 덕분에 한 번도 강도를 당한 적이 없다. 하지만 바투 동굴로 향하는 차를 탈 때까지만 해도 이 봉지가방이 나에게 어떤 재앙을 가져다줄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기차에서 내려 동굴 계단을 향해 걸어가는데, 원숭이들이 심상치 않은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냥 낯설어서 그런가 보다 하며 무시하고 동굴 계단을 올라가려던 찰나, 원숭이 한 마리가 달려오더니 내 봉지가방을 낚아채 가려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난 원숭이에게 꺼지라며 고함을 질렀고 원숭이는 이빨을 드러내며 기어코 가져가겠다는 강렬한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원숭이는 이 봉지 안에 먹을 게 들어있다고 생각했나보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씩씩대는 원숭이가 무서웠지만 봉지 안에는 내 돈과 카메라를 포함한 귀중품들이 다 들어있었기 때문에 절대 포기할 수 없어 나도 이를 악물고 봉지를 잡아당겼다. 상상해보라, 원숭이 한 마리와 인간 한 마리가 봉지 하나를 잡고 서로 고함지르면서 싸우고 있는 꼴을. 대략 10초간의 강렬한 다툼 끝에 결국 승리자는 내가 되었지만 전혀 유쾌하지 않은 승리였다. 사람들이 봉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노린 것이 원숭이한테는 중요한 것이 될 줄이야 참 아이러니하다. 원숭이와의 결투 후 봉지는 집어넣고 계단을 계속 올라갔다. 정말 계속 올라갔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공허한 상태에 다다랐을 때 즈음 계단의 끝이 보였다. 길이 400m, 높이 100m의 동굴 그리고 그 안에 지어진 사원, 무엇보다도 272개의 계단을 오르고 내려다보는 탁 트인 경관까지, 바투 동굴은 여행의 설렘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말레이시아는 세계여행의 첫 여행지라는 의미도 있지만 내가 여행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 곳이기도 하다. 지도 보는 법, 환전하는 법, 관광지 정보 구하는 법까지 하나씩 하나씩 스스로 해나가면서 혼자 하는 배낭여행이 어떤 건지 감을 잡아갔다. 한국에 있을 때는 전화 한통이면 뭐든지 손쉽게 알 수 있었고 나를 도와줄 친구들도 많았는데, 타지에 혼자 떨어지다 보니 정작 내가 할 줄 아는 것들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 직접 알아보고 배우고 해결해야했다.

처음으로 하는 것은 항상 긴장되고 망설여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딱 한 번만 해보면, 그래서 처음이 아닌 것이 되면, 모든 것은 익숙해지고 쉬워진다. 오늘 글에 나온 이야기들은 모두 ‘처음’ 겪어본 것들이었다. 그래서 실수도 많았고 긴장도 많이 했다. 하지만 이다음 글부터는 다시 나오지 않을 에피소드들이다. 공항에서 비행기 타는 법, 입국 심사하는 법, 내 물품 관리하는 법 등등 ‘처음’이 어려웠지 익숙해지니까 이야기 거리도 안 될 만큼 쉬워졌다. 모든 것은 시작이 어렵다. 하지만 ‘처음’이 지나가면 내가 언제 그런 걱정을 했나 싶을 정도로 쉬워진다. 아직까지도 ‘처음’이라는 단어가 무서워 망설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한 번 질러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그럼 그 ‘처음’이라는 단어가 매우 쉬워질 것이다.

첫 여행지였고 다양한 첫 경험들을 선물해준 말레이시아는 아직까지도 ‘처음’이라는 강렬한 단어로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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