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의 부패에 대한 저항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가 부정으로 얼룩지고, 4월 11일 마산에서 최루탄에 희생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4·19혁명의 불꽃이 점화되었다. 4월 19일 우리학교 학생들은 교문을 나서 국회의사당(현 세종로)으로 향했다. 각 대학의 학생대표들은 거리에서 즉석 토론을 갖고 역할을 분담했다. 이때 우리학교는 권력의 핵심부인 경무대(景武臺)로 향하는 1만여 명의 시위대를 선두에서 지휘하였다.

경무대 앞에는 무장한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학생들은 저지선을 뚫기 위해 도로에 설치된 수도관을 방패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시위대가 돌진하는 순간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었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우리학교 법학과 3년에 재학 중이던 21세의 노희두(盧熙斗) 학생이 산화(散華)하였고, 28명의 학생이 중상을 입었다.

이날 경찰 발포로 전국에서 모두 142명이 숨지고 1천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4월 25일 258명의 대학교수들이‘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든 채 국회의사당까지 시위를 벌이면서 시위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 나갔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하야를 발표하였다.

4·19혁명 이후 각계각층의 민주화 요구가 빗발치는 가운데,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세력은 장면 내각을 사퇴시키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출범시켰다. 박정희 의장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성안(成案)하면서 부족한 개발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비밀리에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였다. 이에 각 대학은 1964년 봄, 굴욕적 한일 외교를 중단
할 것을 촉구하며 대대적인 시위에 나섰다. 격렬했던 대학가의 시위는 6월 3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잠시 수그러들었으나 1965년 4월 개학을 계기로 다시 불거졌다.

우리학교 학생들도 1965년 4월 13일 교문을 나서 충무로로 진출하였다. 이미 충무로 5가에는 경찰이 저지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결국 학생들은 물리력으로 저지하는 경찰에 투석전으로 맞섰다. 이 과정에서 농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중배(金仲培) 군이 부상으로 쓰러졌다가 이틀 후인 4월 15일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은 전국 대학에 휴교조치를 내린 후 한일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렇듯 우리학교는 역사의 고비 때마다 맨 앞에 서서 불의에 항거하였으며, 그 정신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용범
소설가·동국 100년사 대표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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