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도 변함없는 학구열

해방 직후 좌우익으로 나뉘어 극한적인 대립을 벌이고 있던 한국사회는 단독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안정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제1공화국이 수립된지 2년도 채 안 되어 6·25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인민군이 서울 시내로 진입하면서 교문이었던 황건문의 편액(扁額)이 적군의 포탄에 맞아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대학 건물도 인민군에게 접수되었다. 도서관의 도서조차도 인민군이 휴지로 사용하거나 계급장을 만드는 재료로 활용하였다. 미처 피난하지 못한 교수들은 인민군에게 불려가 고된 심문을 받아야 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폐허가 되어버린 필동 교사에는 뿔뿔이 흩어졌던 교수와 학생들이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황은 급속히 악화되었고, 학교당국은 학적부를 얇은 반지(半紙)로 사본을 만들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김동화 학장은 12월 20일경 모든 서류를 대구시 남산동에 있는 동화사 별원으로 이동시키고, 대학본부도 그곳으로 임시 이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교부는 1951년 2월 19일 부산에 연합대학을 구성하여 피난 학생들로 하여금 합동수업을 하도록 하였다. 이에 우리학교 학생들은 그해 4월부터 부산·전주·광주·대전·대구 등의 전시연합대학에서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학교수들은 부산에 피난하고 있어 영도 해동중학교에 설치한 전시연합대학에 출강하고, 부산으로 피난한 학생들도 그곳에서 강의를 받았다. 그 밖에 대전·광주·대구·전주등에서 수강하는 학생 수도 218명에 달하였다.

전시연합대학이 1년간 계속되자 학생 수도 점차 늘어났다. 이에 우리학교는 문교부에 단독 개교를 통보하고,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학생들을 모아 부산시 신창동 1가 6번지 대각사(大覺寺)에 임시 교사를 마련하였다. 임시 교사는 조선불교 중앙총무원의 경남교무원이 사용하던 6평짜리 사무실 1실과 회의실 겸 교수실로 사용한 3평짜리 1실 등 모두 24평에 불과하였다.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갔다. 많은 교수들이 납북되거나 행방불명되는 봉변을 당하였고, 미처 부산으로 피난하지 못한 교직원들도 많았다. 그러나 한동안 마비상태에 빠졌던 대학교육은 재단과 학교당국의 노력으로 1951년 9월에 이르러 정상화되었다.

이용범
소설가·동국 100년사 대표 집필자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