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동캠퍼스로의 이전

해방이 되자 각 학교는 개교와 함께 교육정상화를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1946년6월 8일 문교부는 미군정이 공포한 대학령에 의거하여 ‘고등교육제도의 임시조치’를 발표하였다. 이 조치에는 3개 이상의 단과대학을 종합한 규모의 대학을‘종합대학교’, 인문 혹은 자연과를한 단위로 한 기관을‘대학’으로 한다는 기준이 포함되어 있었다.

혜화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승격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는 학교시설의 미비와 재정적 뒷받침이었다. 혜화동의 학교 건물은 해방과 함께 반환되었으나 부지 2,700여 평에 건립된 2층 건물은 불과 251평에 불과하여 대학 건물로 사용하기에는 매우 비좁았다. 재단은 수차례의 논의 끝에 중구 필동 3가 26번지 일대의 부지에 새로운 교사를 건립하기로 하였다. 필동의 토지는 일본 조계종이 소유하고 있던 땅으로 2만 3,987평의 넓은 대지에 연건평 617평의 목조 기와지붕 건물 7개 동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45년 9월에 출범한 조선불교 중앙총무원은 이듬해 4월 15일 중앙에불교중앙총무원 및 조계학원 재단을 설립하기로 하고, 1946년 5월 20일에는 38선 이남의 각 사찰이 200만 평이라는 광대한 토지를 재단에 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교지가 확보되고, 재단이 증자를 통해 안정을 되찾으면서 대학 승격에 필요한 조건이 모두 완비되었다. 그러나 문교당국이 정한 기준에 부합했던 연희전문·이화여전·보성전문은 1946년 8월 15일에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었으나 혜화전문학교는 불교전문학교라는 성격과 3개 단과대학 확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9월 20일에 동국대학으로 승격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정규대학으로의 승격을 계기로 전면적인 학제개편이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대학의 학제를 학부와 전문부로 나누고, 전문부는 전문1부와 전문2부로 구분하였다. 학부는 불교학과·문학과·사학과, 전문1부는 불교학과·문학과·사학과, 전문2부는 국문학과·문화과·역사과로 편성하였다. 그러나 향후 종합대학교로 승격하기 위해서는 학부를 확대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두됨에 따라 1947년 5월에 학부를 문학부와 정경학부로 분리시키기로 하고, 정경학부에 정치학과 및 경제학과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당시 타 대학에서는 정치학과 경제학이 상학부에 편재되어 있었다.

따라서 정경학부는 우리학교가 국내 최초로 편제한 학부였다.

이용범
소설가 · 동국 100년사 대표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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