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남결 윤리문화학과 교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그런대로 통하지만, ‘윤리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당부나 권유는 공허한 헛소리쯤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이런 반응은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나 한국사회가 과연 윤리적인가? 라는 되물음이기도 해서 착잡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뭔가 불편하고 잘못된 것 같아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얼른 모르는 척하고 만다. 그래봤자 ‘흥, 윤리(학) 전공자가 아니랄까봐’와 같은 무안을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새삼스럽게 법과 윤리의 차이를 강조하자거나 ‘법은 최소한의 윤리’란 말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법의 가짓수가 늘어난 만큼 윤리의 영역은 형편없이 줄어들고 있음을 안타까워 할 따름이다. 예전 같았으면 이웃들 간의 배려와 양보로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는 사소한 문제들을 법정다툼으로 가져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아졌는가! 이같은 사회현상을 가리켜 어떤 윤리학자는 ‘법의 종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윤리의 필요성은 더욱 더 적어진다’고 진단한다. 어쨌든 현대사회는 윤리적 사고가 중시되는 자율의 시대가 아닌 법의 준수여부를 모든 행위의 판단기준으로 삼는 타율의 시대가 되었다.

 
연구실에서 교수회관 앞의 주차장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종종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늦게 온 교수가 버젓이 장애인 표시가 되어 있는 구역에 얌체주차를 하는 것이다. 급한 볼일이 있어 잠깐 정차하는 것이 아니다. 하루 종일 또는 다음 날에도 그의 윤리의식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용역직원도 당신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고개를 돌려버린다.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 교수의 행위는 사회적 합의를 어긴 것일 뿐만 아니라 남에게 현저한 불이익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당연히 옳지 못한 행위이다. 또한 그런 행위를 되풀이한다는 것은 동기나 품성의 측면에서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만약 교내 주차장에서도 벌금딱지를 붙이거나 견인조치가 이루어진다면, 즉 일종의 범법행위로 간주된다면 그 교수는 당장 차를 다른 곳으로 옮길 가능성이 크다. 법의 제재가 무섭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크고 작은 일들에서 윤리적인 성찰이 외면당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최근 미납 추징금을 완납하기로 한 두 전직 대통령의 기사를 읽고도 아쉬움이 컸다. 그들의 결정은 결국 법의 힘 앞에 굴복한 것이지 도덕적인 후회의 결과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일까?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윤리와 도덕은 여전히 할 일이 남아 있다고 믿게 되었다. 윤리는 인체에 비유하면 생명의 유지에 필요불가결한 물과 공기 같은 것이다. 더 이상 오염된 물과 더러워진 공기로는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없다. 멀지 않아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윤리야, 조금만 참고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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