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장, 나흘 후면 제댈세.”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개운하진 않나? 유능한 군인이었는데.”
푸르딩딩한 입술과 째진 입, 그리고 훤칠한 키와 답답해 보이기만 한 조그만 눈, 그가 아무래도 훌륭한 군인 일성싶다.
“서운하군.”
“.....”
박병장은 말을 잃은 사람처럼 묵묵히 서있었다. 창밖은 소리 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가도 좋아.”
하고 김중위가 말했다.
박병장은 경례를 붙이고 나서 집무실을 나왔다. 명주천처럼 부드러운 비가 뿌연 물안개를 흩날리면서 내리고 있었다. 건너편 산엔 뜨물 같은 안개가 흰 띠를 두른 듯 산중턱을 휘감고 있었다.
그는 빗속을 가로질러 막사로 달렸다. 막사 앞 잘 정돈 된 화단엔 붉은 지렁이들이 느리게 이동하고 있었고, 여러 마리의 두꺼비가 허공을 향해 보옥보옥 숨을 내쉬었다가 가끔씩 자리를 옮겨 앉곤 했다.
박병장이 막 막사 안으로 들어서려니까 병사들은 내외 바람으로 한쪽에 몰려서 ‘카드’놀이에 열중해 있었다. 한쪽에서 고함을 치고 돈을 긁어 가면 그때마다 요란한 환성과 훈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는 그 소란 뒤의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잔치를 치룬 뒷날의 마당을 그는 연상하였다.
그는 그들과 부합할 수 없는 마음이 내재하고 있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큰 눈으로 실내를 살펴보았다.
그가 들어간 출입문 앞으로 시멘트 바닥이 한 줄로 뻗어가 있고, 그 끝져간 곳에 같은 모양의 출입문이 나왔다. 시멘트 바닥 양쪽으론 마룻바닥이 깔려있고, 여기엔 사병들이 누울 수 있는 간격을 두어 담요가 똘똘 말려서 석벽 밑에 잘 정돈되어 있었다.
카드 놀음판하고는 달리 다른 한쪽에 사람이 홀로 앉아서 군용 일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박병장은 그 사병에게로 갔다. 박병장의 시선이 안내한 군용 일지엔 <우천관계로 야영훈련 없음>이란 글자가 꽃처럼 환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좀 후엔 그 글씨도 별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꾸만 이렇게 비가 왔으면 좋겠군요. 병장님”하고 채일병이 군용일지를 덮으면서 말했다.
“난 이제 제대병일세”
박병장이 시금떨떨하게 웃었다. 그 웃는 자체가 너무 무기력하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좀 진한 피로를 느꼈다.
“그럼 잘됐군요.”
“잘된 것도 없지.”
“제대 후엔 무슨 일을 하실 작정이세요.”
“뭐가-”하고 그는 채일병을 건너다보았다.
“음, 매사에 운을 걸어야지”
“부럽습니다. 병장님의 제대가요”
“제댈하기가 무서워지는걸? 처음엔 입대하기가 싫더니”
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채일병도 박병장의 시선을 쫓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외출 나가십시다. 술맛 좋을 겁니다.”
“일요일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지금 나갈 수도 있는데요”
“사실 그래. 하지만 난 쌓여있던 생각들을 마저 정리해야겠어”
하고 그가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시내로 나가십니까?”하고 채일병이 물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문밖으로 나와 버린 뒤여서 대답을 하진 않아도 되었다.
여전히 빗줄기는 시나브로 내렸다. 건너편 산엔 물안개가 자욱했다. 그 안개는 마치 산 덩어리를 용해해버릴 듯 몰몰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초소와는 반대편인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새삼스레 정문을 너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는게 생각난다. 외출증도 없이. 외출증을 갖고도 외출을 못하던 사병들이 얼마나 많던가.
비릿한 비냄새가 코로 물큰 전해왔다. 좀 높은 숲 둔덕에 올라선 그는 주위가 너무 적막하다는 걸 알았다. 햇빛이 밝은 날, 연병장은 종일 먼지를 뒤집어 쓴 병사들이 사열에, 혹은 무슨 공사에 한창이겠으나 이 적막함은 오로지 태만하고 ‘센치’한 장교와 적당히 내리는 비의 덕택인 것이었다. 멀린 산굽이를 돌아간 차도와 초가 마을은 온통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저물어가는 계절의 저물어 가는 날이 차도위에 깔려오고 있었다. 차도에서 그리 가깝지 않은 거리에선 서서히 성하가점거해 오겠지. 그렇게 되면 거리는 눅눅한 공기로 들떠 있을 게고, 나는 그때쯤은 일거리를 찾아 후덥지근한 거리를 헤매고 있을게라-.
그는 칙칙하게 늘어진 활엽수의 사이 길을 걸었다. 습기가 스며있는 산속은(비가 오지 않더라도) 태양광선의 혜택을 받지 못해 흙이 거멓게 그을어 있었으며 그 습지에선 달팽이와 이끼, 그리고 조그만 지붕을 가진 버섯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그는 밋밋한 능선을 넘어 골짜기로 내려갔다. 냇물이 흐르는 계곡주변은 철조망이 허술해서 평소 사병들의 무단외출이 잦은 곳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에 밤에 무단외출을 하던 한 사병이 총에 맞아 죽은 후론 그런 일이 뚝 끊어진 곳이었다. 그는 냇물이 흐르는 개울 밑으로 기어서 철조망을 빠져나왔다. 수월한 방법이었다.
그는 철조망을 따거나 올 때까진 어떤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그것은 철조망을 벗어나야한다는 의무감인 것이었다. 헌데 그곳을 빠져나온 지금엔 그 뒤의 조처가 막연하지 않은가. 무엇이든 해야 하겠고, 어떻게든 되어버려야 하겠는데 그 방향은 자욱한 안개에 갇혀있는 것처럼 좀체로 그 모습을 드러낼 것 같지가 않은 것이다. 그런다고 병영내로 돌아갈 수도 없는 것은 뜻없이 나왔다가 뜻없이 돌아가는 때처럼 쑥스러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가느다란 한숨이 따라 나왔다.
그는 이윽고 도로 쪽으로 걸었다.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이 바람이 불어 올 때마다 물이랑을 이룬 듯 보르르 일렁이면서 물결쳐갔다. 안개로 인해 그의 눈이 제약을 받은 저편엔, 꿈결에서처럼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군용 트럭이 웅덩이에 흙탕물을 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갑자기 차내에서 무슨 고함소리가 들린다고 하는 때에 브레이크가 삐익 밟히면서 차가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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