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선문 중 제일 먼저 개산


三層石塔燈(삼층석탑등) 등 國寶(국보) 즐비


  全南(전남) 長興(장흥)읍에서 靈巖(영암)을 경유치 않고 靈山浦(영산포)읍으로 直行(직행)하는 道路(도로)를 따라 北(북)으로 14‘킬로’를 가면 有治面(유치면) 所在地(소재지)에 닿게 된다. 여기서 ‘버스’를 버리고 동북으로 3等(등) 道(도)로를 따라 6‘킬로’를 걸으면 迦智山(가지산)(509米(미)) 南麓(남록)에 자리 잡고 있는 寶林寺(보림사)에 이르게 되니 비록 6·25때 全燒(전소)되어 현재의 모습은 보잘 것이 없지마는 新羅(신라)때 禪門九山(선문구산)의 搖籃地(요람지)였던 名刹(명찰)이라 짐짓 감개는 비할 데 없이 깊다.
  우리나라의 五敎九山(오교구산) 가운데 禪宗(선종)의 九山(구산)은 新羅(신라) 憲德王(헌덕왕)때(809~825) 道義先師(도의선사)가 이곳을 中心(중심)으로 禪風(선풍)을 떨치자 이른바 迦智山(가지산)파를 이루게 되었고 그 후 私掘山(사굴산) 實相山(실상산) 등의 他山(타산)들도 차츰 開山(개산)되었으며 현재의 韓國(한국)佛敎(불교) 曹溪宗(조계종)은 이러한 禪宗(선종)의 영향이 매우 크므로 韓國(한국)佛敎(불교)의 濫觴地(남상지)로서도 이 절이 차지하는 바 意義(의의)는 대단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절의 창건은 9世紀初(세기초)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그때만 해도 草庵(초암)이었던 것을 憲安王(헌안왕) 4년(860) 道義(도의)의 弟子(제자)인 普照禪師(보조선사)가 擴張(확장)하여 大刹(대찰)의 규모를 갖추었다.
  현재의 堂字(당자)는 요행히 火災(화재)를 毛面(모면)한 外護門(외호문)과 天王門(천왕문), 그리고 近者(근자)에 再建(재건)된 毘盧殿(비로전), 彩閣(채각), 瑤臺(요대) 등 6, 7棟(동)에 不過(불과)하지만 아직도 往時(왕시)의 거창하였던 터전과 鑛石(광석)이 잡초 속에 펼쳐있고 또 9世紀中葉(세기중엽)의 여러 文化財(문화재)들이 찾는 이에게 今昔之感(금석지감)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文化財(문화재)로서는 ‘3層石塔(층석탑)과 石燈(석등)(3基(기))’(국보44호) ‘鐵造(철조)毘盧舍那佛(비로자나불) 坐像(좌상)’(국보117호) ‘東浮屠(동부도)’(보물156호) ‘普照禪師(보조선사) 彰聖塔(창성탑)’ (보물157호) 그리고 ‘普照禪師(보조선사) 彰聖塔碑(창성탑비)’(보물158호) 등이 있는데 특히 3層石塔(층석탑) 2基(기)는 新羅式(신라식) 一般形(일반형)의 것으로 相輪部分(상륜부분)이 完全(완전)하고 兩塔(양탑) 가운데에 있는 輕快(경쾌)한 構造(구조)의 石燈(석등)과 함께 調和(조화)가 매우 잘된 것이며 역시 9世紀中葉(세기중엽)의 作品(작품)인 鐵造(철조) 毘盧舍那佛(비로자나불) 坐像(좌상)(毘盧殿內(비로전내))은 높이 3.3미터의 巨象(거상)으로 그 佛像(불상)의 溫和(온화)한 얼굴과 優雅(우아)한 옷자락은 당시 造像術(조상술)의 一端(일단)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매우 異彩(이채)로운 것이다.
  이 절 둘레의 山(산)에는 樹木(수목)이 없고 절 門前(문전)까지 民家(민가)가 펼쳐져있어 深山九谷(심산구곡)의 절을 찾는 맛은 없다. 그러나 앞서도 말한바와 같이 이 절은 九山禪門(구산선문) 中(중) 제일 먼저 開山(개산)한 中心(중심) 道場(도장)이었기 때문에 韓國佛敎(한국불교)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꼭 찾아 보아야할 곳임을 덧붙이고 싶다. 절 入口(입구)까지 車道(차도)는 있으나 自家用(자가용)이 없는 사람은 有治(유치)서 이곳까지 걸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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