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owulf’와 ‘사람의 아들’을 중심으로

文學(문학)은 발전적 世界觀(세계관) 담보해야
利己主義(이기주의)는 무분별한 서구문화 수용 때문
기독교전래를 가치관변화 초래
現(현)상황 인식 없이는 사회조명 불가능해
한국의 ‘문화충격’현상은 현재도 진행중
우리사회의 ‘문화충격’현상은 中世(중세) 영국사회와 비슷한 점 많아

 

Ⅰ, 머리말
  역사연구의 중요한 목적중의 하나는 현실의 상황을 올바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E.H.Carr의 말처럼 역사연구는 현실에서 출발하여 현실로 되돌아오는 역사적 당위성을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학의 연구도 현실의 올바른 이해와 유기적 관계를 가져야함은 마땅하다.
  시간과 공간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는 중세영국의 문화적 상황과 현실의 한국에 나타나고 있는 문화충격을 연관시켜 사고하는 것이 다소 무리일지도 모르고, 혹자는 코웃음을 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변형된 모습으로 반복한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중세영국의 문화충격과 현대 한국의 문화충격을 문학작품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고찰은 문학작품분석에 있어서 하나의 개연성임을 명확히 밝힌다.
 

  Ⅱ, 중세영국의 문화충격
  신학자 Denis Baly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발전은 수차례의 문화충격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구약성서에 기반을 둔 그의 이론은 神(신)의 개념이 끊임없이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타당성을 갖는다.
  Denis Baly가 이야기하는 문화충격(cultural shock)은 자체의 고유문화집단에 또 다른 거대문화집단의 침입 내지는 이식으로 인한 가치혼란을 통하여 문화적 퇴보, 또는 새로운 문화의 잉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아놀드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이라는 역사이론과 맥을 같이 하는데, 다소의 의미변화는 있을지언정 이러한 문화충격은 세계사에서 끊임없이 진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충격은 영국사를 통하여 중세전기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Angles, Saxons, Jutes로 이루어진 Anglo-Saxon족은 5세기 전반에 영국을 침공하여 정치적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들이 영국 원주민을 규합하여 하나의 통치체계를 이룬 것은 그들과 원주민이 같은 씨족사회의 전통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게르만의 종족사회에 기본을 둔 Anglo-Saxon족이 영국 원주민과 결합하여 종족사회의 문화적 전통을 세웠기 때문이다. 즉, Anglo-Saxon족은 영국 원주민과 문화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주의적 이상’(the heroic ideal)을 사회적 통념으로 표방하였다.
  영웅주의적 이상을 기조로 하는 게르만사회의 문화체계는 기독교의 전래로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영국으로의 기독교 전래는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사회 초기의 서구국가들이 제3세계에 그러했던 것처럼 정치적·경제적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Rome의 영국침공은 고대 말인 4세기초에 있었지만 Anglo-Saxon족의 기독교개종은 6세기 말에야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개종은 당시 지배층 일부의 개종이지 국민전체의 개종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1066년 Norman Conguest가 있을 때까지 ‘속죄를 위한 금전의 기분’(전사사회의 전통)이 법적으로 지속되고 있었다. 이것은 기독교의 개종이 시작된 이후 수백년동안 문화충격에 의한 가치혼란이 사회에 팽배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거대한 문화충격임에도 불구하고 문헌상의 증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기독이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문자의 사용도 기독교의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
  즉, 순수한 게르만족 (존사사회)의 문화유산은 기독교 정신과 혼합되거나 손실되었다. 중세문학에서 종교적인 작가이건 세속적인 작가이건 간에 그들의 작품 속엔 중세기독교가 가르치는 불변의 원리들을 반영하고나 했다는 점에서 중세영국문학의 독창성은 상실되었고, 문화적 퇴보를 거듭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유일의 답으로 내세를 제시하였고, 현실세계의 개혁은 가능한 것도 아니며, 바람직한 것도 아니라고 간주하였다.
  이와 같은 중세 영문학 작품들 중의 예외가 ‘Beowulf’이다. 이 작품엔 기독교인에 의한 기록의 모습이 나타나는 반면, 게르만 사회의 전통이 구체화 되어 나타난다.
  즉, 본 글의 주체인 문화충격으로 인한 갈등의 모습이 작품의 이곳저곳에 스며들어 있다.


Ⅲ, ‘Beowulf’의 이중적 구조
  'Beowulf'는 영국에서 쓰여진 가장 오래된 서사시이다. 그러나 현대에 있어서도 많은 문학비평가들에게 ‘Beowulf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표현하느냐, 게르만의 전통적 세계관을 표현하느냐’에 대래선 좁혀지지 않는 이견들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본 글에선 이러한 극단적 현식논리학적 비평을 배제하고, ‘Beowulf’가 갖는 이중적 구조의 문화사적 의미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기독교의 세계적 진출기반이 되는 것은 기독교의 모태인 유대교의 민족종교적 세계관으로부터의 확연한 분리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분리는 성서적 근거로서 기독교의 신약성서에 대한 강조이다.
  그러나 Beowulf엔 신약성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또한 빈번한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에 대한 언급은 한군데도 찾을 수 없다. ‘Beowulf’에서 Hrothgar가 Heorot궁전을 짓는 것은 신의 천지창조처럼 위대한 역사로 비유되고, Geats족의 적인 Grendel은 카인의 후예로 기술되며, 주인공 Beowulf가 Grendel의 어미의 굴에서 발견한 칼에는 거인족의 내력과 홍수에 의한 그들의 몰락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이러한 구약성서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일부 독자(비평가)들에겐 기독교적 내용의 충실한 표현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내용이 일종의 유대민족에 대한 신화적 역사서술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같은 종족사회의 문화체계인 게르만사회에 종교와 무관한 호소력을 갖았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Narton Athology의 저자는 “Hrothfar의 의식에 관한 연설조차도 Beowulf를 훌륭한 기독교인으로 만들기보다는 훌륭한 게르만종족의 지도자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주시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Beowulf에 등장하는 기독교적 모습은 기독교와 전사사회의 전통이 혼재하고 있었던 기록된 시대의 사실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완전한 기독교 국가의 모습도 갖추지 않고, 완전한 전사사회의 모습도 없는 중세초기 영국의 역사적 형태는 문화충격으로 인한 갈등의 시대였다.
  이와 같이 중세영국의 문화충격으로 인하여 기독교적 세계관은 'Beowulf에서 축소적으로 표현되었다. 물론 기독교적 세계관뿐만 아니라 게르만족 전사사회의 문화체계도 기독교적 세계관의 도전으로 인하여 자체모순을 인식하고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고자 Beowulf에서 그 세계관을 축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충격은 분명히 발전적 세계관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발전의 요소들 중의 하나가 복수에 관한 딜레마이다. 복수의 계율은 게르만사회의 율법으로 계승되어 왔는데, 이러한 계율의 모순에 대한 인식이 Beowulf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Beowulf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사건들 중의 하나가 Hrethel왕에 대한 묘사인데 Htrthel왕은 그의 아들중의 하나가 우연히 (사고로) 그의 또 다른 아들을 살해한 사건이 있는 다음 굉장한 슬픔을 겪는다. 게르만 전사사회의 침족계율에 의하면 친족을 살해하거나 친족으로부터 보상을 받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똑같은 계율에 의하면 죽은 자의 복수를 위하여 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은 죽인 자를 살해하거나 그로부터 속죄를 표시하는 금전의 보상을 받아야만 했다.
  Hreghel왕은 이러한 딜레마에 빠져 더 이상 일상적 삶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이와 같은 딜레마는 Hrethel왕 개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통념의 가치관 상실이라는 기존사회의 지속성에 관한 문제이다. 이것은 기독교 세계관의 침입으로 인한 전통적가치관의 모순 발견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가치관의 딜레마로 Beowulf의 전 과정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 운명(기독교적 숙명의식)과 용기(전사사회의 영웅주의적 이상)의 대립과 갈등이다.
  기독교적 숙명의식은 인간의 상대적 왜소함으로 인한 절대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에 대하여 나타내는 무조건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Beowulf’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갑작스런 죽음, 적으로부터의 갑작스런 공격, 혹은 사태의 갑작스런 변화 등은 작품에서 빈번히 나타난다. 따라서 'Beowulf'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방대하면서도 추월적인 존재의 그물 속에 갇혀있는 것 같고 그곳으로 부터의 탈출에 대한 희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주인공 Beowulf와 관련될 때 기독교의 숙명의식은 고개를 숙인다. Beowulf가 기독교적 세계관의 정상적 질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Beowulf’가 숙명적인 기독교적 악에 연루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은 Beowulf의 출신에 대한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전혀 신의 의지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항상 카리스마적 존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을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기독교적 죄악인 거만함(Pride)에 연관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Beowulf가 보여주는 용기는 신의능력을 침범하는 인간의 자만이라고 보다는 운명이 허용하는 최고의 범위에서 그의 민간적 잠재력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Beowulf의 삶을 지속적으로 이끄는 것은 다른 인물들이 보여주는 삶처럼 기독교적 운명이아니라 전사사회 최고의 덕목인 용기이다. 전사사회의 가치관에서 용기는 영웅이 자신을 자각하게 되는 도구이므로 작품 속에서 Beowulf는 “운명은 흔히 인간의 용기가 의로울 때 운명이 다하지 않는 인간을 구원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신의 의지인 운명조차도 인간의 의지인 용기에 의하여 변형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용기와 운명의 대립은 현대 서구 비평가들에게 문학적 허세로 보일수도 있다. 즉, 영웅의 용기 있는 행동은 현대 서구의 독자들에게 '운명에 대한 시험의식'이라는 불쾌감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쾌감은 작품의 내용적 결함이 아니라 기독교적 사고에 매몰된 현대 서구인들 자신의 결함이다. 서술한 바와 같이 작품이 갖는 문화충격의 내용적 요손ㄴ 기독교도 저자가 게르만적 전통을 기독교화 하려고 의도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종족전통인 전사사회의 세계관을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뚜렷하다.
  따라서 Beowulf가 제공하는 궁극적 감동은 기독교적 숙명의식의 세계관이 아니라, 전사사회의 전통인 인간적 용기의 분명성이다.


Ⅳ, 현대한국의 문화충격
  현대 한국사회 당면한 문화충격은 문화적 인식 이전에 역사적, 정치적 그리고 사회사적 인식이 필수불가결하다. 즉, 현대 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분단의 문제와 정치·경제적 종속형태의 인식 없이 한국사회의 문화충격에 대한 전체적 조명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본 글에선 중세영국의 문화충격과 연관시켜 기독교적 세계관과 한국적(유교적 내지는 불교적) 세계관의 상호대립적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의 전래는 구교의 경우 2백년 신교의 경우 1백년이 지났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기독교와 한국적 전통과의 대립과 갈등은 한국인 각 개인에게 상당히 첨예하게 나타났다. 또한 기독교의 전래과정에선 뚜렷한 종속적 요소가 드러나지 않지만, 기독교의 발전과정에선 뚜렷하게 정치·경제적 종속의 요속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반년에 한국사회와 문화의 발전에 기독교의 기여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때문에 신문학 초기에 나타난 계몽문학류의 작품들 중에선 기독교인이라는 명칭이 현대의 문화인을 내포하기도 한다. 이러한 구체적 요소의 나열은 차치하고, 기독교적 세계관과 한국적 세계관의 대립으로 나타난 문화충격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겠다.
  첫째로, 두 세계관의 대립은 현실 지향적 세계관과 내세 지향적 세계관의 갈등이 빚은 문화충격이다. 부분요소인 불교와 요교는 뚜렷하게 현실 지향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기독교는 분명히 내세 지향적이다. 물론 이러한 두 세계관의 대립과 갈등은 변증화의 관점에서 두 문화체계로 인한 자체의 모순을 발견 변혁시켜야한다는 당위성을 내포시키고 있다. 따라서 두 세계관을 논할 때, 한국에 존재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한국적 전통과 무조건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현대 한국의 전통적 세계관은 그 발전과정에서 다소의 기독교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며, 기독교적 세계관(개체 한국 기독교인의 의식)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불교와 유교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즉, 한국의 전통적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은 모두 현대 한국문화의 부분요소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상호모순의 발견과 변화·발전의 당위성은 두 문화체계 담당자의 공통적의무인 셈이다.
  둘째로 나타나는 문화충격의 갈등은 공동체적 세계관과 개체적 세계관의 대립이다. 유교의 씨족중심적 문화체계와 오랫동안 민족종교로서 자리 잡은 불교는 단일민족의 성격을 뚜렷이 하는 한국인들에게 공동체적 일체감을 제시해왔다.
  반면에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구원을 추구하는 개인적 신앙형태라는 점에서 현재 개체저인 개인주의의 해로운 양상인 이기주의는 기독교의 영향이 아니라 현대 상업사회의 도입으로 인하여 무분별하게 서구 상업문화를 직수입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유교가 기반을 두었던 조선시대의 계급주의적 요소가 아직도 남아있고, 불교의 권위주의적 요소 또한 전통문화의 결함으로 나타나는 것이 한국의 문화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문화충격으로 나타난 특징들을 되새기면서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 나타난 문화충격의 양태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많은 작품들 가운데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라는 작품을 선택한 것은 이 작품이 중세 영국의 문화충격의 내용과 유사한 한국 문화충격의 기독교적 본질을 다루면서 문화충격의 갈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Ⅴ, ‘사람의 아들’의 이중구조
  '사람의 아들'의 이중구조 중세영국의 문화충격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빈약한데 반하여 현대 한국의 문화충격에 대한 문헌은 질적 양적으로 방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충격을 고찰하는데 있어서의 한계는 문화충격의 현상이 현재 진행되는 역사이지 중세영국의 상황처럼 과거의 분석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에 대한 언급은 문화충격의 입장에서 바라본 작품분석이지,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는 문화충격의 전체적 언급은 아니다.
  ‘사람의 아들’은 기독교의 도그마를 부정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살펴볼 때, 중세의 문화체계와 세계관을 이끌어 왔던 서구의 이데올로기이며 그 도그마는 19세기에 그 근본적 이론이 철학적 입장에서 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이 담고 있는 표피형식은 기독교의도그마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내면구조는 70년대 한국의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즉, 문화충격의 사회적 의미에 있어서 서구적 가치의 가장 논리적 체계인 기독교가 한국하회 내에서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것과 함께 현대 한국 사회구성체에 대한 비판이 작품의 근본적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람의 아들’은 이중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민요섭과 아하스 페르츠 그리고 조동팔이 기독교의 논리체계에 정면도전하는 반면에 사건을 쫓고 있는 날 경사의 객관적 의식표출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이룬다.
  소설의 첫머리에 나타나는 남경사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서구취향이나 물질적 허세에 대하여 습관적 우울에 빠지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그는 사회적으로 패배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지만 사회의 근본적 구조에 대한 인식을 정확하게 내포하는 인물로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남경사는 개인의 사회적 행위로서 다소간의 문학수업과 고시를 공부했던 인물이다. 1945년생이라는 그의 이력은 해방과 전쟁이후의 산란스러운 세대를 체험한 소시민의 대표격이다.
  이와 같은 문화충격의 관점에서 ‘사람의 아들’을 세가지면에서 비판하고 한다.
  첫째, 소설 속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아하스 페르츠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나도 지루하게 연속되고 있다.
  물론 소실이 내포하는 특성중의 하나가 허구성을 내포한 허구적 미학의 표출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문화충격의 사실적 관점에서 출발한 민요섭의 방황이 아하스 페르츠를 통하여 구체화되었다기보다는 관념의 유희와 지적, 난해성으로 인하여 민요섭의 행동마저도 신비화 내지는 허구화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이문열의 다른 작품들에서 관념의 유희적 모습이 자주 나타나는 것처럼 작가의 뚜렷한 한계라고 볼 수 있다.
  둘째로 민요섭과 조동팔의 기나긴 방황의 결과로서 그들 사상의 전수라고 할 수 있는 ‘쿠아란타리아書(서)’는 궁극적으로 기독교의 한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대 한국 문화충격의 사회적 현상에서 정당성을 회득하고 있는 민요섭의 기독교 도그마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끝을 맺는다. 남 경사가 민요섭과 조동팔의 집단에서 사이비 종교집단의 냄새를 맡는 것은 이러한 결과의 측면에서 소설이 내적 긴밀성을 제공하지만 소실이 이끌고 가는 문화충격이라는 내용적 측면에선 뚜렷한 한계를 지닌다.
  셋째로 앞의 두 가지 단점을 극복시켜주는 남 경사의 의식 성장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작품의 서두에서 표현되는 남경사의 모습이 현대 한국 소시민의 평균치를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의 의식의 눈뜸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남 경사의 고정된 나약한 이미지만을 제시하고 문화충격의 현상학적 모습만을 제시할 뿐 소설작품이 지녀야할 인물의 성격발전과 작품자체의 발전적 의미에서 수반되는 내용적 미학의 결여라고 볼 수 있다.


Ⅵ,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중세 영국의 문화충격과 현대 한국의 문화충격은 기독교 세계관과 전통적 세계관의 대립과 갈등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갖는다.
  중세 영국은 오랫동안 Beowulf와 같은 문학적 감동을 제시하는 작품을 상실한다. 그 시대에 잉태된 모든 문학작품은 기도서나 찬송가처럼 절대적인 신의 찬양과 같은 이야기만이 되풀이될 뿐, 게르만적 전통에 의거한 인가의 모습은 어떤 작품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중세초기의 문화충격이 기독교적 세계관의 일방적 헤게모니로 끝났음을 의미한다. 즉, 영국의 문학가 Beowulf이후 문학적 생명력을 획득한 것은 8백년의 암흑기를 거친 후(Chaucer의 등장)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현대 한국의 문화충격에 대한 문학적 형태는 단순히 사실적 표현의 형식미가 아니라 한국 공통의 발전적 세계관을 담보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는다. 이와 같은 철학적 의미의 발전적 세계관이 우리의 문화형식에 내재하지 않을 때, 중세 영국의 문화적 암흑기가 우리들에게 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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