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한 늦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기석이는 바바리깃을 올리며 청량리 로타리에서 동북켠으로 향했다. 눈에 익은 좁다란 언덕길이 길게 세워져 있었다. 그 길은 예전과 다름없이 구불졌고 퀴퀴한 냄새는 여전했다.
  청량사는 밋밋한 등성이 아래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양갓집저택 모양 차분히 앉아있었다.
  그런데 연숙인 여기 있을까? 그는 가슴이 심하게 뛰어왔다. 대문 앞까지 다가갔을 때, 마침 대문을 나서려던 웬 소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머리숱이 부성한 십 칠 팔세나 됐을 법한 소녀였다. 그녀는 주저주저할 뿐 어째서 왔느냐고 묻지를 못하고 있었다.
  기석이도 그저 멍청스레 서 있었다. 연숙일 만나러 왔는데, 왜 이렇게 이름을 못 대는 걸까. 모를 일 이었다.
  산 중턱 게딱지만한 변소는 다 허물어져가고, 듬성듬성 서 있는 큰 나무에선 낙엽들이 바람에 떨어져 흩날리고 있었다.
  “저어 우리 스님 찾으세요? 혜은스님 말예요”
  안타까웠던지 소녀가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네에, 그런데…”
  그가 얼떨결에 얼버무리자, 소녀는 말끝을 맺기도 전에 부리나케 안으로 뛰어갔다. 그렇지, 그 애가 연숙일 알 리가 만무지, 망설이던 자신이 바보스러워졌다.
  한참만에야 자그마한 노스님이 나오셨다. 몇 년 만인가, 그는 반가움이 앞서서 성급해지는 것이었다.
  “아, 스님 안녕하십니까?”
  “오오라, 기석이 학생이군그래. 자, 어서 들어갑시다.”
  몹시나 반기셨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그런 반김이 서먹해졌다.
  그때, 겨울에 쓰던 둥근 털실모자를 벗어서일까, 차분하던 모습의 스님은 이 순간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 같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자꾸 남처럼 느껴졌다. 속세에 머무는 처지에 남일 것은 틀림없으나 그래도 몇 달 간 가까이 지내던 분이었는데, 왜 이리 나만 외동져가는 심경일까, 그는 갑자기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저물어 가는 하루 그리고 싸늘한 만추의 바람 때문은 아닌 성 싶었다.
  “들어가쟤두, 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지?”
  “먼저 법당이며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그렇시구료.”
  스님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앞장섰다.
  “저 혼자 돌아보겠습니다.”
  앞섰던 스님이 발을 멈추며 뒤돌아서서 흠칫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흐느적 대웅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주위로 여러 어린 행자들이 잰 걸음으로 왔다 갔다 한다.
  법당에선 재를 올리는 모양이었다. 주지스님이 불공을 드리는데 행자 둘이 양 켠에서 사뿐 사뿐 거들고 있었다. 주지스님 뒤로는 소복한 젊은 부인이 연신 합장을 하며 큰 절을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바깥에 서성대던 행자 몇 이는 서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킥킥거렸다.
  해가 거의 기운 법당 앞마당은 고요가 머물고 화단에 연해 놓인 서너개 화분의 꽃들은 시들해 있었다.
  “학생! 담배 한 대만 줄 수 없소?”
  주춤 놀라 돌아보았다. 웬 허름한 중년남자가 눈 아래 마당 끝 마루에 걸터앉은 채 손을 내밀고 있었다. 술 취한 얼굴이었다.
  “여기선 금연인데요!”
  담배가 없는데요, 했으면 좋았을 걸, 그도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어도 꾹 참았다.
  “아, 그런가? ……제길 내가 죽어버려야 저 꼴을 안 보지.”
  중년남자는 그저 고무풍선같이 허공에다 던지듯 말했다.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기석이는 비스듬히 선 몇 개 안 되는 돌층계를 내려섰다. 해가 설핏 기울면 이 좁다란 뜰엔 어둠이 차근히 깔려오겠지, 그는 초라해졌다.
  조그마한 행자 하나가 과일이 가득 담긴 제 접시를 받쳐 들고 사뿐사뿐 걸어온다. 그는 다가서며
  “저어 연숙이라는, 아니 정순이라는 행자 지금 있습니까?”
  그는 연숙이 아닌 정순일 대고는 금세 후회했다.
  “어머, 벌써 환속했는데요. 그런데 어떻게 아세요?”
  “전에 여기서 하숙했었거든요.”
  “네에, 그렇세요.”
  미소가 담긴 얼굴이 무척 고왔다.
  손에 받쳐들은 과일접시가 무거워보였다. 그는 끝내 연숙이 얘긴 못 꺼냈다.
  불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연숙인 여기 와 있을까? 꼭 입산하겠다고 그것도 여승만 있는 청량사에 있고야 말겠다고 늘상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네였지. 그런데 왜 혜은 스님에게 물어보질 못했던가, 그는 다 자꾸 안타까워졌다.
  이 가을로 접어들며 부터 기석이는 점점 연숙이가 타인처럼 느껴졌다. 피로가 눅진히 깔린 다방구석의 의자에 축 쳐져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꼭 2년째, 그것도 깊숙이 사랑해온 사이인데 자기와 그네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관계란 걸 절감하고는 전율했다. 병적인 소녀, 위궤양? 그깟 신체적인 병쯤, 기석에겐 기실 큰 장애가 되진 않았다. 그 고쳐지지 않는 마음의 병이 문제였다.
  토요일 저녁, 기석이는 학교신문 조판을 일찍 끝내고 그네를 만났다. 가로등 아래서 그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긴 머리칼이 한 켠 눈을 내려 덮어 고운 얼굴이 한결 파리했다.
  “숙이, 젊다는 가능성으로 언제나 만나야 하는 거야. 그래, 무한한 꿈을 수놓아야지.”
  “지금 이 시간마저도 난 불안한 걸요. 석인 왜 제게 시간을 자꾸 빼앗기는 거예요?”
  풀죽은 목소리였다. 언제나처럼 고개를 내려뜨린 채였다.
  (또 그 얘기구나)
  “숙인 자학으로 점점 심신을 깎아내고 있는 거야.”
  그녀는 말없이 불빛 아래를 떠나 숲 쪽으로 향한 벤치로 가 앉았다. 그도 그녀를 따라 옆에 무겁게 앉았다. 멀리 장충단공원을 찾아드는 사람들이 희미하게 움직인다. 자주 차량들이 도로를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녀의 한쪽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미동도 없다. 이번엔 아래로 내려뜨린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치켜 올려주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눈가를 가린 머리칼을 쓸어 올려주며 입술을 포갰다. 사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녀는 오늘따라 입술이 눌린 채, 시체같이 잠잠하다가 갑자기 그를 밀치고 일어나면서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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