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문턱에 들어선 이들에게

綺羅星(기라성)같은 著名敎授(저명교수)…懸河(현하)의 講(강)
爲學(위학)의 一念(일념)들끓어
“눈감으면 그 學窓(학창)이 다가선다”


  “潤物細無聲(윤물세무성)”의 春雨(춘우)를 바라며 追憶(추억)을 더듬는다는 것은 멋진 노름이다. 하물며 금잔디의 그때이니 만큼 “當春乃發生(당춘내발생)” 절로 앞장을 선다.
  하니까 1946年(년)9月(월)부터 1950年(년)5月(월)까지 이 東國大學校(동국대학교)에 在學(재학)했었으니 딴은 ‘東國(동국)’이란 이름으로는 허울 좋은 第1回(제1회) 卒業生(졸업생)이다. 현재 在職(재직)의 同期(동기)로는 李東林(이동림) 교무처장 史學科(사학과) 李龍範(이용범)교수 (渡中中(도중중)) 李英茂(이영무)강사, 金鎬鎭(김호진) 경리과장 그리고 筆者(필자)가 있을 뿐이다. 한편 財團理事(재단이사)로 李外潤(이외윤)(京畿大學長(경기대학장))교수가 있다.
  당시는 이른바 해방의 혼란과 左右(좌우)의 角逐(각축)으로 말미암은 뒤범벅의 소용돌이 속에 말려든 兒時韓國(아시한국)이다. 그 서슬에서 學(학)을 닦겠다고 몰려든 晩學徒(만학도)와 他日(타일)의 大成(대성)을 노리고 모인 實利派(실리파)와 學兵(학병) 및 應徵(응징)으로 失期(실기)한 正統(정통)이 들끓었다.
  學科(학과)는 佛敎學科(불교학과), 國文學科(국문학과), 英文學科(영문학과)(卒業時(졸업시)갈랐음)와 史學科(사학과)가 있었을 뿐이고 學生(학생)이라야 百餘名(백여명)이 筆洞(필동)의 東岳(동악)을 뜻대로 누비며 사뭇 내일을 주고받았었다. 비록 초라했을망정 슬기의 광은 문턱이 닳았고 대화의 터전이 大洋(대양)을 넘봤다. 참으로 푸짐한 나날이었고 호젓한 나날이었다. 도타운 友干(우간)에 乾川(건천)이 시샘을 했고, 나름 없는 師弟間(사제간)에는 酒母(주모)가 무색했다. 실로 남산의 호랑이가 하품을 하던 시절이었다. 하기야 西北(서북)이 판을 치고 染紅(염홍)이 활개를 쳤지만 爲學(위학)의 一念(일념)은 어느 누구에도 一寸(일촌)을 사양치 않았다. 피 식은 自讚(자찬)이 아니라 피 끓는 도가니였다. 생각사록 그저 대견하다.
  거리에는 전차가 고작이고 꾀죄죄한 마차가 달리는가 하면, 자전거 옆에 座席(좌석)을 꾸민 人力(인력)사이드카가 最新(최신)을 뽐내던 시절이다. 따라서 연대와 이대는 기차통학을 해야 했고, 고대는 徒步(도보)로 통학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여기에 地利(지리)를 탔고 運營(운영)의 合理(합리)를 꾀한 우리 東國大學(동국대학)이 君臨(군림)한 것은 당연하다. 市內(시내)에 자리한 반반한 大學(대학)이라고는 서울大(대)뿐이었으니 말이다.
  成均大(성균대)와 國學大(국학대)는 그때는 比肩(비견)의 여지가 없었음은 世人(세인)이 아는 바다. 게다가 動亂後(동란후) 拉北(납북)되어 住處(주처)모르는 許英鎬(허영호)학장의 敎學爲主(교학위주)의 英斷(영단)은 著各敎授(저각교수)를 망라할 수 있었고, 반면에 서울大學(대학)은 國立綜合大學案(국립종합대학안)에 반대하느라 同盟休學(동맹휴학)으로 들끓고, 敎授陣(교수진)은 교통이 편한 우리 東大(동대)로 몰리는 판세라 우리는 정녕 오붓하게 자랐다. 비록 21敎授團(교수단)의 궐기로 운영의 是正(시정)을 따지느라 톱클래스가 다소 빠졌으나 고스란히 졸업했다.
  당시 屈指(굴지)의 교수만 꼽더라도
權相老(권상노) 金映遂(김영수) 金東華(김동화) 金法(김법)린 金(김)잉石(석) 趙明基(조명기) 卞榮晩(변영만) 梁柱東(양주동) 李秉岐(이병기) 李熙昇(이희승) 李殷相(이은상) 趙潤濟(조윤제) 方鐘鉉(방종현) 李崇寧(이숭영) 金晋變(김진변) 李河潤(이하윤) 朴鐘和(박종화) 金起林(김기림) 鄭芝溶(정지용) 柳應浩(류응호) 李丙?(이병?) 閔泳珪(민영규) 李(이)선根(근) 金斗憲(김두헌) 朴鐘
鴻(박종홍) 丁奎昶(정규창) 皮千得(피천득) 趙容萬(조용만) 禹亨圭(우형규) 崔鳳守(최봉수) 林學洙(임학수) 吳宗植(오종식) 崔虎鎭(최호진) 趙東弼(최동필)…의 기羅星(라성)이 懸河(현하)의 名講(명강)으로 우리의 고삐를 바짝 당기었다. 눈만 감으면 그 學窓(학창)이 다가선다.
  同期(동기)로는 거의가 敎育界(교육계)와 言論界(언론계)에 投身(투신)하여 우렁찬 近代化風(근대화풍)을 타지는 못하고 있으나 제자리만은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佛敎學(불교학)의 李外潤(이외윤), 徐京保(서경보) 小說(소설)의 郭夏信(곽하신), 詩(시)의 金宗吉(김종길) (3學年(학년)때 高大(고대)로 轉學(전학)), 時調(시조)의 李禹出(이우출), 國語學(국어학)의 李東林(이동림), 國文學(국문학)의 筆者(필자)와 金泰均(김태균) (京畿大(경기대)교수) 丁益燮(정익섭)(全南大(전남대)교수), 史學(사학)의 李龍範(이용범) 宋俊浩(송준호)(全北大文理大學長(전북대문리대학장)), 孫祥敎(손상교)(前京畿大學長(전경기대학장)), 李英茂(이영무)(朝鮮大(조선대)교수) 등이 각기 오질 앞을 챙기고 있다.  
  在學時(재학시) 가장 두드러진 追憶(추억)이라면 붉은 皇建門(황건문)을 나서며 眼下(안하)에 도사린 서울을 노려보는 快感(쾌감)이다. 左右(좌우)로 갈려 長安(장안)이 왁자한 서울이었지만 足下(족하)에 꿇은 서울이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은 순간의 喜悅(희열), 그것은 詩經(시경)의 “生此王國(생차왕국)”을 느닷없이 외우게 했고, 杜詩(두시)의 “一覽衆山小(일람중산소)”를 體得(체득)하게 했다.
  講義室(강의실)이라고는 지금의 禪武道場(선무도장)이 第一講堂(제일강당)이고, 지금의 本部建物(본부건물) 앞의 잔디밭에 第二講堂(제이강당)이 있었고, 大學禪院(대학선원)이 第三講堂(제삼강당)이었지만, 해방과 더불어 야릇한 虛脫感(허탈감)을 學(학)으로 채우고 사회의 어수선을 同志愛(동지애)로 삭힐 수가 있었다.
  이렇듯 과거는 보람과 바람으로 환경을 지배하며 살은 東國大學(동국대학)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斜陽族(사양족)의 훈수를 받을 만큼 제자리걸음에서 허덕이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先頭(선두)의 영광을 놓친 無力(무력)이 되고만 느낌이다. 참으로 몸부림과 맘부림이 오싹 소름을 끼친다. 어느새 山小(산소)가 아니라 山大(산대)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주저  앉지는 않았으니 백번다행한 일이다.
  새봄에 함께 中興(중흥)의 시그널은 떨어졌다. 京鄕(경향)의 英材(영재)가 東岳(동악)에 모였다. 凡鳥(범조)를 무찔러 그 피를 땅에 뿌릴 임자가 그득히 모였다. 先後(선후)가 一心(일심)으로 다짐하여 어제의 東大(동대)위에 또 하나의 塔(탑)을 세울 役軍(역군)이 득시글하다. 바라건데 우리 모두가 스스로 옷깃을 여며 先(선)을 찾는 主人(주인)이게 勇往精進(용왕정진)하기를 애꿎은 떡국 값으로 바라는 마음 하늘에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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