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석인 말없이 그 집을 나왔다. 거리엔 사람과 차량들이 밀리고 있었다. 모두들 생활에 바삐 움직이고 있는 걸까, 제기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그는 비틀거렸다.
  (연숙인 절로 갔다)
  눈시울이 아려왔다. 진하게 아픔이 저미어 오는 그런 심경이었다. 싸하게 밀려오는 늦가을 바람은 더욱 그를 아프게 만들었다.

  불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목탁소리, 사뿐사뿐 행자들의 발걸음 소리-.
  그는 다시 돌층계를 올라 대웅전을 거쳐 칠성각 옆 반석위에 걸터앉았다. 황혼 무렵 불그레한 기운이 경내에 가득 실물결처럼 밀려들었다. 문득 개구쟁이 행자 정순이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정순이는 우락부락한 얼굴에 길게 자란 머리칼은 거칠었다.
  그가 하도 적적해 기타를 켜노라면 계집애는 언제나 스님이 시킨 걸레질은 건성으로 하며 목청 높여 꽥꽥 따라 불렀다. 그때 혜은스님은 기다란 창호지 문을 확 밀치고 얼굴을 내밀며 꾸짖는 것이었다.
  “계집애가 어째 저모양이야. 시킨 일은 하지도 않고선”
  “알았어요. 괜히 야단이셔.”
  “조 계집애가! 열댓살 먹도록 때마다 밥만 태우는 년이-!”
  마침 공양주가 없을 때 여서 정순이가 추위에 오들대며 밥을 말아 지었다.
  스님은 더 노해서 열을 띄었다.
  “네 에미가 거지노릇 하는 걸 보다 못해 데려다 밥 먹여주니까는 이젠 되려 말대꾸야!”
  계집애는 울상인 채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고 그는 기타 켜기를 멈추고 이불을 쓰고 누웠다. 그것은 이따금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다 싶이 하는 것이었다.
  입시를 사흘인가 앞두고 학원공부를 청산하고 돌아온 날 밤이었다.
  “마라타 마라나…”
  정순이가 몹시 추운 날 마루 밑의 연탄불을 갈면서 큰 소리로 무언가 외우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한참 만에 그녀가 저녁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머리엔 털실로 짠 둥근 모자를 쓰고 조그만 치부책 같은 것을 손에 쥐고 있었다. 무성하던 머리칼이 보이질 않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정순이, 머리를 잘랐구나?”
  “아저씨, 글쎄 아까 스님 둘이서 가위로 박박 깎아버렸어우. 깎아주랴,고 자꾸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래라고 했지만서두.”
  그녀의 볼 위엔 주륵주륵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말썽꾸러기만도 아닌성 싶었다.
  “절에선 우선 조용히 해야지. 그리고 춥더래도 스님이 시키는 대로 얼른 얼른 해놔야 되고.” 
  그는 어떻게 달리 달랠 수가 없었다.
  “그래두 스님은 너무 해유. 슬쩍하면 거지같은 년이라고 하는 걸유.”
  으스스한 저녁바람이 몸에 베어들었다. 법당 앞뜰은 불그레한 황혼이 가시고 땅거미가 내려앉아 점점 어둑해져 왔다.
  얼마 후 혜은스님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계셨다. 기석은 이젠 물어보리라 다짐하며 돌층계를 내려 스님 앞으로 다가갔다.
  “석이 학생, 여적 여깄었군 그래”
  “스님, 혹시 며칠 전에 새로 온 처녀하나 있지 않습니까? 연숙이라 하는-”
  “연숙-이라? 오라, 저 스물이나 뵈는, 머리칼이 기인-”
  “네, 바로 그 여자예요. 만나게 해주십시오. 머리를 잘랐습니까? 스님?” 몹시 흥분된 어조였다.
  (어쩐지 오늘 학생이 달라보이더니만…)
  스님은 속으로 뇌이며 옆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행자 하나에게 일렀다.
  “얘야, 가서 저쪽 구석 방 새로 온 언니 오라고 해라.”
  짐작이나 해 뒀던 양 행자아이는 잽싸게 달려갔다.
  숙이가 여기 있다니,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한참 만에 연숙이가 예전 옷차림으로 나타났다. 긴 머리칼이 온 얼굴을 덥고 있었다. 그녀는 몹시 놀라는 눈빛을 담고 주춤했다. 그는 한 동안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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