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적 서정시 모색해야

詩(시)는 知性(지성)의 깊은 感性(감성)을 노래
固有思想(고유사상)으로 영원한 生命(생명)을


  國民學校(국민학교) 時節(시절) 女先生(여선생)의 피아노 가락에 흐뭇하던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픈 충동의 조용한 기쁨일 때, 애써 가꾸어온 花草(화초)가 어쩌다 말라 죽어 갈 때의 안타까운 가슴일 때, 텅 빈 집안에서 天井(천정)을 보며 우주의 몸짓을 생각하며 맘부림을 할 때, 이들 째릿하게 느껴오는 마음을 글로 옮겨 나대로의 表現(표현)을 해 보고자 무진히도 애타하던 날 그로부터 詩(시)를 쓰려고 했던 것일까
  詩(시)는 왜 쓰는가 여기에 詩(시)의 無用論(무용론), 有用論(유용론)을 생각하기 以前(이전)에 文字生成(문자생성) 前(전) 太初(태초)에 손짓 몸집으로 意思傳達(의사전달)을 하고 그 後(후) 말이 생겨 意味(의미) 傳達方法(의미방법)이 수월하게 되었을 때, 詩(시)는 이미 存在(존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고 싶은 말, 전하고 싶은 뜻이 있을 때, 詩(시)는 있어왔고 詩(시)를 쓰는 것도 바로 그 말을 하는 것일게다. 그렇다고 一般對話(일반대화)가 전부 詩(시)라는 말은 아니다. 내가 人類(인류)에게, 自然(자연)에게 또 내가 내 自身(자신)에게 하는 말, 이것이 形式(형식)을 갖출 때 詩(시)가 되고 그 말이 하고 싶어, 무작정 쓰고 싶어 쓰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 詩(시)를 한 편도 써보지 못한 이는 詩(시)쓰기가 쉽게 되고, 쓰면 쓸수록 어려워진다는 것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
  한篇(편)의 詩(시)를 빚기까지는 있어온 나름의 體驗(체험)을 通(통)해서 한 알의 씨가 썩어 꽃을 피우듯 긴 인종과 苦痛(고통)으로 眞實(진실)한 執念(집념)에 끊임없는 文字(문자)의 鑛脈(광맥)을 뒤쫓는 일이다. 상상의 나래를 펴고 아픈 가슴으로 어둡고 깊은 溪谷(계곡) 아니면 밝고 넓은 하늘에서 하나의 言語(언어)를 물고 오는 作業(작업), 이 깊은 境地(경지)에 달할 때 슬픈 孤獨(고독)을 느끼는 것이다. 슬픈 孤獨(고독)을 느낄 때 기쁨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기쁨은 그림을 보는 視覺的(시각적)인 것과 音樂(음악)을 하는 聽覺的(청각적)인 悅樂(열락)과는 또 다른 精神(정신)속의 깊고도 幽玄(유현)한 것을 느낄 수 있다. 한 篇(편)의 詩(시)를 읽고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면 쓸 수가 있고, 詩人(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詩(시)라면 반드시 아름답게 理解(이해)될 것이며 充分(충분)히 感動(감동)을 傳達(전달),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런 때 詩(시)는 혼자의 중얼거림이 아닌 作者(작자)의 對話(대화)라야 한다. 무엇을 말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文字(문자)의 羅列(나열)은 難解詩(난해시) 이전에 詩(시)라고 볼 수 없겠다.
  西歐(서구)에서는 ‘말라르메’의 象徵詩(상징시) 이래 ‘T.S. 엘리엇’의 主知的(주지적) 경향에 이르기까지 이 難解詩(난해시)에 對(대)해서 論難(논란)을 거듭해 왔다.
  오늘날의 詩(시)는 노래하는 音律的(음율적) 詩(시)로부터 생각하며 느끼는 보고 知覺(지각)하는 詩(시)로 變遷(변천)해 왔다. 이에 作者(작자)의 생각하는 樣相(양상)이 달라져 왔고 詩(시) 機能(기능)의 변천으로 그 傳達方法(전달방법)도 幅(폭)이 넓어졌기 때문에 難解(난해)해진 것은 불가피한 일인 것이다. 또한 오늘날 詩人(시인)의 現實意識(현실의식)과 個人(개인)의 內的世界(내적세계)를 表現(표현)하고자 하는 主體的(주체적) ‘리얼리즘’으로 더욱 難解(난해)해 질 수 밖에 없었기에 우리는 이런 現代詩(현대시)의 難解性(난해성)을 肯定(긍정)해야 될 것이다.
  만일 讀者(독자)의 知識不足(지식부족)과 主觀的(주관적) 槪念(개념)에 自己(자기) 詩(시)의 貧困(빈곤)으로 理解(이해)하지 못하고 難解(난해)하다고만 한다면 난센스일 수밖에 없다.  反面(반면)에 作者(작자)가 現代詩(현대시)라는 껍데기로 能力不足(능력부족)과 안일한 思考(사고)로 超(초)‘미니’時代(시대)에의 自己(자기)의 貧弱(빈약)한 肉體(육체)를 가리기 위해 미니ㆍ스커트를 거부하는 듯한 어려운 낱말로만 주어모아 나열한다면 文字(문자)의 희롱밖에 多樣(다양)한 生活(생활)과 錯雜(착잡)한 感情(감정)속에서 어떻게 論理的(논리적)인 이미지를 停頓(정돈)하고 秩序(질서)를 갖추느냐에 따라 現代詩(현대시)의 生命(생명)이 부여되고 따라서 그 形式(형식)도 천태만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詩(시)에 있어서는 一定(일정)한 形式(형식)이 없다고도 할 수 있으나 어떤 內容(내용)이 담겨질 때, 形式(형식)이 이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思想(사상)과 內容(내용)에 따라 詩(시)의 形式(형식)이 다르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줄곧 一定(일정)한 形式(형식)으로만 쓴다고 할 때 거기서 詩人(시인)의 使命(사명)은 끝났다고 할 수가 있다. 多樣(다양)한 形式(형식)의 詩(시)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쉼없는 工夫(공부)와 생각을 해야만 될 것이다.
  自然(자연)을 노래하고 浪漫(낭만)을 즐겨하던 時代土俗的(시대토속적)인 槪念(개념)이나 moral로 音律的(음율적)인 영탄을 주로 하던 때는 大衆(대중)과의 거리가 멀지 않았고, 讀者(독자)와 共通(공통)된 感動(감동)을 쉽게 傳達(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現代(현대)의 雜多(잡다)한 事件(사건)과 現像(현상)에서 ‘이미지’의 表出(표출)은 그 適確性(적확성)과 詩(시)와 生活(생활)과의 連?(연?)에 不足(부족)함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現代(현대)의 새로운 리듬이 創造(창조)와 복잡한 技術(기술)의 전환에서 音樂性(음악성)을 밑바탕으로 하던 것을 繪畵的(회화적)인 것으로 바뀌게 되었고 奇拔(기발)한 메타포를 表現(표현)함에는 심벌, 안비키테, 아이러니, 패러독스 等(등)의 복잡해진 詩(시) 對象(대상)을 具像化(구상화)하기 위핸 기교가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이런 것들이 大衆(대중)과 거리를 두고 難解(난해)를 일으키는 主知的(주지적) 傾向(경향)으로 흐르게 했다는 것은 당연한 科程(과정)인 同時(동시) 一長一短(일장일단)을 말할 수 있다.
  이에 나는 詩(시)는 항용 머물러 있지 않고 現在(현재)를 기준으로 未來(미래)를 向(향)하는 動的(동적)인 것이라 믿고 諸對像(제대상)을 마음이라는 동그라미 속에 이미지를 知覺(지각)하고 感性(감성)을 知的(지적)인 抒情(서정)속으로 表出(표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걸 抒情的(서정적) 主知詩(주지시)라고나 할까. 이것은 나의 신선한 自覺(자각)에서 오는 즐거움이다.
  나는 또한 어떤 이즘이나 流波(유파)에 타협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오리지널화 하는데 있다. 古典(고전)이니 浪漫(낭만)이니 實在(실재)이니 하는 派(파)여러 主義(주의)에 빠지게 되면 한정된 테두리 속에서만 部類(부류)를 이루어 發展(발전)이 없이 그 속에서만 머무르게 된다. 허나 이런 主義(주의)나 流(류)를 무시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의 詩(시)를 이룩했을 때, 詩人(시인)은 自己(자기)의 位置(위치)를 둘러보고 앞으로의 可能性(가능성)을 알게 될 때 發展(발전)이 있는 것이다. 詩(시)는 결코 發展(발전)하는 過程(과정)이지 目的(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참고서나 어떤 자연과학의 해석집을 知識傳達(지식전달)의 一定(일정)한 目的(목적)만 이룩하면 그 임무는 끝이 났다고 할 수 있겠지만, 詩(시)는 知性(지성)과 感性(감성)이 조화를 이룬 精神(정신)의 次元(차원)높은 內的行動(내적행동)의 所産(소산)인 것이다. 그러기에 詩(시)는 단순한 知的所産(지적소산)이 아니라 知性(지성)을 밑바탕으로 한 感性(감성)의 所産(소산)인 것이다.
  詩人(시인)은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게 하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詩人(시인)은 必要(필요)하고 詩(시)는 읽히어져야 된다는 말이다.
  知性(지성)의 토양 이에 感性(감성)의 꽃이 어떤 色(색)깔로 나타나느냐 하는 表現方式(표현방식)에 따라 詩(시)는 기쁘게도 슬프게도 느껴지고 生命(생명)이 붙는 것이다. 이런 생각 아래 나는 虛構(허구)를 眞實(진실)이상으로 단정하여 讀者(독자)에게 感動(감동)을 주는 것이 詩人(시인)의 使命(사명)이며 眞實(진실)이라 보고 누구의 詩論(시론)이나 어느 詩學(시학)도 아닌 내 自身(자신)의 方法(방법)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아무리 難解(난해)한 世代(세대)의 領土(영토)라 하드래도, 우리들의 知性(지성)속에 고유한 思想(사상)을 내포하지 않은 깃폭을 수 없이 나부낀다 해도 詩(시)의 無用論(무용론)을 면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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