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법흥왕 때 창건

李朝(이조) 初期(초기)의 石塔(석탑)많아
 

  光州市(광주시) 東南方(동남방)에 우뚝 솟아 있는 無等山(무등산)(1,187m)은 百濟(백제) 때는 武珍岳(무진악), 新羅(신라)때는 瑞石山(서석산)으로 불리다가 高麗(고려) 이후 無等(무등)이란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온 산이 土山(토산)이어서 돌무더기의 展示場(전시장)이라 할 만큼 크고 작은 돌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뿐만 아니라 山麓(산록)에는 亞高山帶植物(아고산대식물)이 7百餘種(백여종)이나 있고, 또한 許百鍊(허백련) 畵伯(화백)이 經營(경영)하는 茶園(다원)과 소머리만큼이나 큰 늦여름철의 수박 등으로 그 이름이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이 無等山(무등산) 서쪽 기슭의 證心寺(증심사)는 元曉(원효)ㆍ長雲(장운)ㆍ東國(동국)ㆍ普德(보덕)ㆍ彌內(미내)ㆍ白雲(백운)ㆍ藥藥(약약) 등 山內(산내) 여러 寺庵(사암) 중 規模(규모)가 큰 寺刹(사찰)로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이 절은 절 入口(입구)의 碑石(비석)에서 그 由來(유래)를 찾아보면 일찍이 新羅(신라) 法興王(법흥왕)祖(조)때 哲鑑寺(철감사)가 創建(창건)하였고 高麗(고려) 宣宗(선종) 11年(년)(1094) 慧照國師(혜조국사)의 重建(중건)과 李朝(이조) 世宗(세종) 시 全羅道(전라도) 監察事(감찰사)이었던 金傲氏(김오씨)가 자기의 祿俸(녹봉)으 重修(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現存建物(현존건물)의 大部分(대부분)은 近來(근래)에 모다 손질이 된 흔적이 역력히 보이고 있다.
  現存建物(현존건물)로는 大雄殿(대웅전)을 비롯하여 五百殿(오백전)(羅漢殿(나한전)), 四聖殿(사성전), 冥府殿(명부전), 證心堂(증심당), 鶴山藏書閣(학산장서각), 寮舍(요사) 等(등)이 있고 사경 곳곳에 형태가 완전한 삼층石塔(석탑) 1기와 불완전한 3층(1기) 및 오층石塔(석탑)(2기)들이 서있다.
  이 石塔(석탑)들은 대개 李朝初期(이조초기)의 것들로 推定(추정)되는데 이 이외에 또 近年(근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七層石塔(칠층석탑)도 있다.
  또한 5百殿(백전) 옆에는 높이 6尺(척)가량의 石佛像(석불상) 1軀(구)가 露天(노천)에 서 있는데 별로 注目(주목)할만한 것은 못되나 좌대만은 新羅(신라) 때의 것으로 보인다.
  指定文化財(지정문화재)로서는 統一新羅時代(통일신라시대)의 作品(작품)인 鐵造昆虛舍那佛坐像(철조곤허사나불좌상)(보물131호)이 있는 바 높이가 90cm정도인 이 鐵佛(철불)은 원래 光山郡(광산군) 瑞坊面(서방면) 東溪里(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에 이 절로 옮겨 현재는 四聖殿(사성전) 內(내)에 安置(안치)되어있다. 이 不詳(불상)은 面相(면상)의 表現(표현)에 비해 대범하게 조각된 法衣(법의)의 褶襞(습벽)과 두 귀가 짧은 점 등이 눈에 띈다.
  이 절은 光州(市內(광주시내)에서 第一(제일) 水源池行(수원행) 합승을 타고 終點(종점)에서 내려 약 1ㆍ5‘키로’정도 걸으면 쉽게 찾을 수 있다. 水源池(수원지)로부터 이 절에 이르는 도중에는 許百鍊(허백련) 畵伯(화백)의 別莊(별장)과 茶莊(다장)이 있어 韓國(한국) 固有(고유)의 茶(다)맛을 맛볼 기회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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