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과 죽음을 낳는 것들’의 향연


  나는 지난 초여름 한 수필에서 여름이 싫다는 글을 썼다. 疫病(역병)이 橫行(횡행)하고 旱魃(한발)이 아니면 洪水(홍수)가 나고 사람의 肉體(육체)뿐 아니라 神經組織(신경조직)까지도 解體(해체)시키는 듯하는 暴炎(폭염)의 季節(계절)은 나뿐 아니라 누구나 싫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이제 그 지긋지긋한 여름은 까마득한 옛일만 같지만 그래도 今年(금년)과 같은 例年(예년)에 없었던 더위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슨 煉獄(연옥)의 試鍊(시련)이나 겪은 듯이 몸서리가 난다. 그 여름에 比(비)하면 이 가철은 몸과 마음이 살찌는 듯한 상쾌한 季節(계절)이다. 바깥은 바깥대로 좋고 방안에 있으면 그대로 또 좋다.
  단풍이 바다를 이루는 海印寺(해인사) 峽谷(협곡)을 안 찾아도 가까이 景福宮(경복궁) 담 안에만 들어도 은행나무의 落葉(낙엽)으로 온통 黃金(황금) ‘카펫’이 깔린 가을의 絶境(절경)을 볼 수 있다. 그 ‘카펫’ 위에 뒹굴면 한껏 높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그럴듯한 想念(상념)에 잠겨보는 것은 다시 없는 가을의 浪漫(낭만)이다.
  가을의 浪漫(낭만)은 그것뿐이 아니다. 落葉(낙엽)을 밟으며 街路樹(가로수) 밑을 거니는 것, 孤獨(고독)에 잠기는 것 등 흔히 말하는 가을의 ‘센티멘탈리즘’이다.
  그러나 가을을 그 氣溫(기온)과 日氣(일기)로써 讚揚(찬양)하는 것은 별 문제이지만, 기타의 意味(의미)에서 讚揚(찬양)하는 것은 ‘난센스’이고 그것은 다분히 少女的(소녀적) 趣味(취미)가 아니면 文學靑年(문학청년)다운 未熟(미숙)한 情緖(정서)의 소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完全(완전)히 覺醒(각성)된 成熟(성숙)한 마음으로 이 가을의 情景(정경)을 볼 때 그 무엇 하나 마음을 슬프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가령 단풍과 落葉(낙엽)을 가을의 미의 象徵(상징)인 듯이 말하지만 그것은 그런 것을 그림이나 文學作品(문학작품)을 보듯이 現實(현실) 아닌 것으로 보는 까닭이다. 우리가 그것을 現實(현실)로써 좀 더 切實(절실)히 생각해보면 그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殘忍(잔인)하다. 深黃色(심황색) 深紅色(심홍색)으로 병든 나뭇잎들이 가지에서 떨어지지 않을려고 끝내 바둥거리다가 微風(미풍)만 일어도 우수수 떨어지는 光景(광경)은 너무 애처롭고 슬픈 諷經(풍경)이다. 그처럼 茂盛(무성)하던 여름의 수많은 잎이 앞으로 不過(불과) 數日(수일)이면 모조리 지고서 앙상한 裸木(나목)만 寒天(한천)에 우뚝 서있을 것을 생각해보면 누구나 죽음의 처절한 矛盾(모순)을 聯想(연상)하게 된다.
  이때 우리 人生(인생)도 결국 저렇게 虛無(허무)하다고 아니 그렇게 抽象的(추상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절실히 나도 저렇게 그리고 내 愛人(애인)도 내 子女兄弟(자녀형제)도 결국 얼마 안 있으면 한 때 아름답던 肉體(육체)가 병들어 저 落葉(낙엽)처럼 소리 없이 죽어버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면 참아 그 생각이 너무 견디기 어려워 눈을 감지 않고는 못 배기리라.
  그런 例(예)를 반드시 단풍과 落葉(낙엽)에서 찾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지금 꽃이 滿發(만발)해있는 火丹(화단)을 보자. 장미 다리아 菊花(국화) 等(등)이 한창이지만 그 잎이나 꽃엔 피어오르는 生命(생명)의 빛이나 싱싱한 健康色(건강색)은 하나도 없이 暗綠色(암록색), 暗紅色(암홍색) 暗褐色(암갈색) 等(등) 모두가 병색에 물들어 죽음을 앞둔 女人(여인)이 마지막 紅潮(홍조)를 聯想(연상)시키리만큼 요염하기만 하다.
  그런 요염한 發惡(발악)도 불과 數日(수일)이지, 하룻밤 서리만 내리면 鹽水(염수)에 담긴 野菜(야채)처럼 완전히 풀이 죽어 그대로 시들어 버리고 만다. 그 꼴 또한 悽慘(처참)하다.
흔히 가을의 音樂(음악)이라고 하는 벌레소리는 그것이 우리 人間(인간)에게 歡喜(환희)와 讚美(찬미)의 情(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孤獨(고독)과 哀愁(애수)의 回憶(회억)의 情(정)을 주어 듣는 이를 사뭇 슬프게만 만든다.
  그래서 그 애처로운 벌레소리는 흔히 달밤과 田園(전원)의 諷經(풍경) 등과 어울려 頹廢的(퇴폐적)이고 不健全(불건전)한 鑑賞(감상)의 文學(문학)을 많이 만들어낸 것이다.
또 가을을 結實(결실)과 成熟(성숙)의 季節(계절)이라 하여 키츠 같은 詩人(시인)이 노래한 일이 있지만, 結實(결실)과 成熟(성숙)은 곧 죽음을 意味(의미)하는 것이다.
  누렇게 黃金(황금) 물결치는 가을의 田園(전원)은 그것을 가을걷이 뒤의 荒凉(황량)한 들판의 이미지 없이는 볼 수 없다. 사과를 따고난 뒤의 果樹園(과수원), 穀食(곡식)을 걷어드린 뒤의 그루터기만 남은 논밭, 거기에 一陣北風(일진북풍)이 스쳐갈 때를 생각해보면 가을을 結實(결실)과 成熟(성숙)의 季節(계절)이라고 즐거워할 여유가 없다. 바람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가을을 가장 가을답게 하는 것이 가을의 바람이다. 가을은 날씨의 變德(변덕)이 심해서 淸明(청명)한 날씨도 금시 흐려지며 찬바람이 휩쓰는 수가 많다. 그 바람이 시골 들판으로 落葉(낙엽)을 휩쓸 때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처량한 것은 도시의 아스팔트 위로 먼지를 굴리고 갈 때다. 해가 나온 동안에 명랑하고 여유 있던 都市人(도시인)은 삽시간에 陰鬱(음울)해지고 초조해진다.
  추위와 바람이 앙상한 都市人(도시인)의 품안에 스며들 때, 그들은 당장 威脅(위협) 당하는 生存(생존)앞에 감히 挑戰(도전)한 勇氣(용기)를 잃고 冷嚴(냉엄)한 現實(현실) 앞에 발발 떨며 동동걸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이처럼 가을바람은 죽음의 豫告(예고)인 듯이 都市人(도시인)을 싸늘하게 威脅(위협)한다.
  결국 가을은 우리가 도처에서 죽음의 豫表(예표)를 보는 季節(계절)이다. 봄부터 여름으로의 오랜 希望(희망)과 浪漫(낭만)이 허물어지고 人間(인간)의 現實(현실)을 露骨的(노골적)으로 切感(절감)시키는 참으로 殘忍(잔인)한 季節(계절)이다. 自然(자연)은 人間(인간)의 헛된 꿈을 깨뜨려주고, 人間(인간)의 媚藥(미약)함과 不完全(불완전)함과 有限(유한)함과 短命(단명)함과 一切(일체)의 虛無(허무)함을 뼛속 깊이 느끼게 해주는 季節(계절)이다. 가을에 生産(생산)된 수많은 文學(문학)이 과연 어떠한가를 생각해 보면 이 事實(사실)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人間(인간)은 결국 늙어 죽는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지극히 觀念的(관념적)이다.
  그 奄然(엄연)한 現實(현실)을 가능한 한 잊고 싶어 하고 外面(외면)하고 싶어 하는 것이 率直(솔직)한 人間(인간)의 念願(염원)이 아닌가. 그러니까 人間(인간)은 希望(희망)과 浪漫(낭만)과 꿈이 비록 헛된 기만적인 것 인줄을 알면서도 그것을 의지 삼아 그 속에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간혹 늙음이나 죽음을 찬양한 詩人(시인)이 있지만 그것은 건전한 人間(인간)의 상식은 아니다. 가령 ‘知慧(지혜)는 늙음과 더불어 온다’는 詩句(시구)를 생각해 보더라도, 그 知慧(지혜)가 萬有(만유)의 眞理(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소중한 知慧(지혜)일지라도 나는 그런 知慧(지혜)를 얻기 위하여 늙음을 원치 않겠다. 어리석어도 좋으니 젊음과 希望(희망)을 갖고 싶다.
  그 詩(시)를 쓴 詩人(시인)도 아마 그랬겠지만, 늙음에 임하여 어찌할 수 없는 滯念(체념)에서 그렇게 말했으리라.
  그러나 가을은 우리에게 그런 헛된 希望(희망)을 許容(허용)치 않는다. 우리의 가련한 실체를 여지없이 露骨化(노골화)하여 보여주고 견디기 어려울 이만치 實感(실감)을 강요하니 너무 殘忍(잔인)하지 않은가 ‘人間(인간)은 너무 지나칠 現實(현실)에는 견디기 어렵다’는 엘리엇의 詩句(시구)가 생각하는 季節(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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