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기에 ‘총카파’가 불교개혁

현세적 합리적으로 佛敎(불교)이해
달라이ㆍ라마는 관음의 화신


  티베트에 佛敎(불교)가 정식으로 輸入(수입)된 것은 6世紀初(세기초)라고 한다. 8世紀(세기) 後半(후반)에서부터 印度(인도)의 密敎(밀교)는 물론, 顯敎(현교)가 흘러들어가기 始作(시작)했다. 그러다가 9世紀(세기)초에 와서 ‘티베트’에 一大(일대) 排佛(배불)이 일어나서, 約(약)1世紀(세기) 동안은 佛敎(불교)가 자취를 감추었다가 다시 復活(부활)된 티베트 佛敎(불교)는 모두가 印度(인도)의 後期(후기)에 있었던 密敎(밀교)뿐이었다.
  元(원)의 世祖(세조) 수비라이(在位(재위)1260~1294)는 ‘팍파’(八思巴(팔사파))를 帝師(제사)로 任命(임명)하여 티베트 佛敎(불교)를 절실히 信仰(신앙)하였고 帝師(제사)인 팍파루 역시 역대 元(원)의 皇帝(황제)에게 絶對的(절대적)인 信賴(신뢰)를 얻어서 원의 全佛敎界(전불교계)와 對(대)西藏關係(서장관계)의 政事(정사)를 處理(처리)하였다.
그 후 ‘티베트’는 獨立(독립)을 喪失(상실)하여 元(원)에 配合(배합)되었으나 絶對的(절대적)인 權力(권력)을 가진 역대의 帝師(제사)를 西藏(서장)의 ‘사캬’에서 元(원)으로 派遣(파견)케 하였으므로 그가 元(원)의 全佛敎(전불교)를 지배하였다. 元朝(원조)로부터의 이러한 지나친 優等(우등)은 ‘티베트’僧(승)을 墮落(타락)시킨 原因(원인)이 되었다. 元史(원사) ‘驛志傳(역지전)’에는 ‘티베트’僧(승)이 行(행)한 諸行惡(제행악)의 모습을 記錄(기록)하고 있다. 또한 元(원)의 朝廷(조정)에서는 매일 盛大(성대)한 佛事(불사)가 행하여져, 莫大(막대)한 國費(국비)를 消費(소비)하였으므로 國家(국가)의 財政(재정)이 破綻(파탄) 되어 元朝(원조)가 滅亡(멸망)한 원인까지 되었다고 한다.
  元朝(원조)는 티베트의 샤카를 優等(우등)하였으나 티베트를 사실상 支配(지배)하고 있었으므로 元朝(원조)가 衰亡(쇠망)하기 始作(시작)하자 티베트인은 드디어 外國勢力下(외국세력하)에 있는 굴욕을 씻으려 하여 티베트인에게서는 復古思想(복고사상)이 대두하고, 그의 趨勢(추세)를 타고 나타난 것이 팍모투派(파)의 창춥걀쳉이었다. 그는 1302年(년)에 出生(출생)하여 9세에 佛門(불문)에 들어가, 사캬派(파)로 들어갔다. 사캬派(파)는 그에게 대하여 극히 好意的(호의적)이었으나, 그 자신은 만족치 않게 생각하여, 드디어 사캬派(파)에 對抗(대항)하다가, 한때는 逃避(도피)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戰爭(전쟁)과 外交(외교)에 能(능)한 그는 그의 적인 팍모투派(파)나, 티궁派(파)를 능가하는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元朝(원조)에 使者(사자)를 보내서, 티베트의 主權者(주권자)로서의 敍任(서임)을 청했다. 敍任(서임)을 받음으로써 모든 것이 正當化(정당화)되기 때문이었다. 마침 그때 元朝(원조)는 滅亡(멸망)하기 직전이었으므로, 티베트에서 가장 강한 자에게 好意(호의)를 베풀지 않을 도리가 없게된 고로, 그에게 大司徒(대사도)의 稱號(칭호)를 주어, 티베트의 主權者(주권자)로서 인정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한편 사캬派(파)는 티베트의 主權(주권)을 喪失(상실)하였으나, 티궁派(파)와 완전히 멸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드디어 탁모투派(파)는 中央(중앙) 티베트에서 東方(동방)에 걸쳐서만 主權(주권)을 장악하게 되어 마침내 팍모투 王朝(왕조)가 成立(성립)하였다.
  그러나 그가 全(전) 티베트를 지배하지는 못하여, 짱地方以面(지방이면)은, 여전히 諸派(제파)가 분립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元朝(원조)는 드디어 滅亡(멸망)하여 명의 太宗(태종)이 中國(중국)을 支配(지배)하고 明朝(명조)는 中國人(중국인)의 손으로 建立(건립)된만치 國粹主義(국수주의)적인 京鄕(경향)을 取(취)하였으므로 라마僧(승)을 優待(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티베트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고 이를 保護(보호)하려고만 했다. 그러나 티베트에 대한 政策(정책)은 元朝(원조)가 取(취)한 것과 같이 사캬派(파)만에 依存(의존)하지는 않아 각파의 라마에 尊號(존호)를 贈與(증여)하여 分割(분할) 痛治(통치)하는 形態(형태)를 取(취)하였고 따라서 티베트가 團結(단결)하여 强大(강대)해지는 것을 防止(방지)하였다.(東洋史硏究(동양사연구) 21, 23號(호) 明朝(명조) 티베트에 8大敎王(대교왕)에 대해서(上(상))參照(참조))
  또한 티베트 僧(승)도 그 中(중)에는 진실하게 佛敎(불교)의 布敎(포교)에 뜻 둔 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개는 入國(입국)을 구실로 稱號(칭호)를 받거나 交易(교역)하여 利益(이익)을 얻으려는 不純(불순)한 目的(목적)으로 明(명)나라에 간 者(자)도 많았다.
  그러므로 明朝(명조)에서는 ‘티베트’僧(승)에 의한 弊害(폐해)를 防止(방지)하기 위하여 국경에서 監察(감찰)하여 一宗派(일종파)의 僧(승)은 3년에 1회씩만 入國(입국)을 시키는 制限(제한)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明史(명사) 卷(권) 331ㆍ12)
  이와 같이 中世(중세)의 ‘티베트’ 佛敎(불교)는 印度(인도) 後期(후기)의 墮落(타락)한 密敎(밀교)를 繼承(계승)하여 ‘티베트’僧(승)은 元朝(원조)의 優待(우대)로써 오히려 墮落(타락)하게 되고 明代(명대)의 ‘티베트’ 佛敎界(불교계)는 混亂狀態(혼란상태)에 빠졌다. 누가 이를 改革(개혁)하지 않으면 안 될 狀態(상태)에 놓인 것이다.
  이러한 때에 나타난 것이 바로 ‘총카파’이다. 그는 1357年(년)(元(원), 順帝(순제)ㆍ至正(지정)17年(년))에 出生(출생)하여 1417年(년))明(명) 成祖(성조)ㆍ永樂(영락)17年(년))에 63세로 卒(졸)하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神密金剛案(신밀금강안)을 學習(학습)하여 19세에 ‘사캬’派(파)의 ‘렝다와’에 師事(사사)하였고 30세에 이르기까지 入中論(입중론), 俱舍論(구사론), 律(율) 등의 顯敎(현교)의 習得(습득)을 하였다 이것이 그의 敎學(교학)으로서 ‘般若中觀(반약중관)’을 根據(근거)로 하게 된 動機(동기)였다. 그는 40세에 ‘菩提道次第(보제도차제)’를 著作(저작)하고 다시 2年後(년후)에 ‘神密道次第(신밀도차제)’를 完成(완성)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宗敎改革(종교개혁) 運動(운동)을 展開(전개)하여 53세에는 1409年(년)에 그의 本據地(본거지)로서 ‘간듼’ 寺(사) 等(등)을 건립하였다. 또한 ‘라사’에서 ‘몬람’의 行事(행사)를 創始(창시)하여 國家(국가)의 隆昌(융창), 佛敎(불교)의 繁榮(번영)을 祈願(기원)했다. 그 後(후)부터 이 行事(행사)는 ‘티베트’의 國家的(국가적)인 最大行事(최대행사)로 되어 구 正月(정월)15日(일)을 中心(중심)으로 前後(전후) 약 20日間(일간)에 걸쳐서 行(행)해졌다. 그의 佛敎改革(불교개혁)의 特色(특색)은,
①學問的(학문적) 基盤(기반)을 龍樹(용수)의 中觀思想(중관사상)에 두고 密敎(밀교)만이 아니라, 오히려 顯敎(현교)를 根本(근본)으로 하고 重要視(중요시)했다. ②戒律(계율)을 重視(중시)하여 佛敎界(불교계)를 正(정)하려하였다. 그는 修道規定(수도규정)을 만들어 嚴重(엄중)히 이를 지키게 하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 獨身主義(독신주의)를 實踐(실천)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宗派(종파)를 ‘게룩파’ (德行派(덕행파) 善根敎派(선근교파))라고 이름하였다. 또한 그의 宗派(종파)를 黃帽派(황모파)라고 하여 從來(종래)의 宗派(종파)인 紅敎(홍교)와 久別(구별)하였다.
  ‘총카파’의 死後(사후) ‘간듼’의 座主(좌주)는 ‘총카파’의 弟子(제자)인 ‘걀찹’과 ‘쾨툽’에 의하여 順次(순차)로 繼承(계승)되어 新宗派(신종파)의 最高統率者(최고통솔자)가 되었다.
일찍이 건립된 新宗派(신종파)의 3大等(대등)인 ‘뢰풍寺(사)’, ‘세라’寺(사), ‘간듼’寺(사) 等(등)을 中心(중심)으로 하는 敎壇生活(교단생활)의 嚴格(엄격)한 것이 民衆(민중)의 信賴(신뢰)를 얻어, 점차로 新宗派(신종파)의 勢力(세력)이 커지게 되고, ‘총카파’의 死後(사후) 젊은 弟子(제자)이고 그의 親戚(친척)인 ‘겐둥풉’이 1447年(년)에 ‘장’地方(지방)의 中心(중심)인 ‘쇤툽체’에 ‘타시포’寺(사)를 건립하여 그 地方(지방)의 布敎(포교)를 據點(거점)으로 삼았다.
이 ‘겐둥툽’을 ‘티베트’人(인)은 第(제)1代(대) ‘달라이ㆍ라마’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當時(당시) ‘달라이ㆍ라마’라고 하는 稱號(칭호)는 없고, 第(제)3代(대) ‘달라이’가 비로소 蒙古(몽고)로부터 稱號(칭호)를 받아, 그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겐둔툽파’를 第(제)1代(대) ‘달라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나 新宗派(신종파)의 實際的(실제적)인 統率者(통솔자)는 이 사람이 아니고 ‘간핀’寺(사)의 座主(좌주)였을 것이다.
  그 후 第(제)2代(대)는 ‘겐듀인ㆍ걈초’가 되었다. 新宗派(신종파)는 帶妻(대처)를 禁(금)하므로 後孫(후손)이 없고 뒤를 이을 자는 없어 輪回轉生(윤회전생)의 思想(사상)으로 그의 轉生者(전생자)를 찾아서 繼承(계승)시키는 것인데, 第(제)2代(대) ‘달라이’는 이러한 制度(제도)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는 의심스럽고, 第(제)3代(대) ‘달라이’ 때부터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한듯하다.
  이때가 되면 新宗派(신종파)의 勢力(세력)이 상당히 강해졌으므로 이 新興宗敎(신흥종교)에 대하여 疑惑(의혹)의 눈으로 冠網(관망)하고 있던 4敎派(교파)도 드디어는 傍觀(방관)할 수는 없게 되었다.
  1498年(년)에 ‘린풍’家(가)가 ‘라사’附近(부근)을 占領(점령)하였으므로 第(제)2代(대) ‘다라이’는 ‘라사에서 避難(피난)하여’ ‘올카’로 稻芒(도망)했다. 그러나 ‘팍모투’派(파)의 武力援助(무력원조)를 얻어 1517年(년)에 드디어 ‘라사’를 回復(회복)하고 ‘몬람’의 行次(행차)를 行(행)할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간신히 新宗派(신종파)의 危機(위기)를 謀免(모면)한 것이다. 다음에 ‘쇠남ㆍ걈초’가 第(제)3代(대) ‘달라이’가 되었다. 그는 ‘팍모두’派(파)와 親近(친근)한 사이였으나 당시의 ‘티베트’는 各地(각지)에서 勢力(세력)다툼을 하여 ‘팍모투’派(파)도 弱化(약화)되어 있었으므로 그에 依賴(의뢰)할 수 없게 되어 그는 蒙古(몽고)에 意志(의지)할 方針(방침)을 取(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티베트’와 蒙古(몽고)는 元朝(원조)때부터 親密(친밀)한 關係(관계)에 있었으나 其後(기후) 蒙古(몽고)에서는 점차 佛敎(불교)가 衰退(쇠퇴)하여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蒙古(몽고) ‘튜멭(Tumet)’部(부)의 ‘알탄’汗(한)의 招待(초대)에 應(응)하여 蒙古(몽고) 巡錫(순석)을 떠났다. 이것은 단순한 布敎(포교)가 아니고 第(제) 3代(대) ‘달라이’로서는 蒙古(몽고)의 武力援助(무력원조)를 期待(기대)한 것이었다. 濟(제)3代(대) ‘달라이’가 ‘알탄칸’과 靑海(청해)에서 서로 會見(회견)하였을 때 여기서 稱號(칭호)의 交換(교환)이 있었다. Altan汗(한)은 제3대 ‘달라이’에게 ‘달라이ㆍ라마ㆍ바쥬라다라’ ‘달라이’는 蒙古語(몽고어)의 바다의 뜻이다. 역대의 ‘달라이ㆍ라마’는 그 이름에 ‘걈초’라고(西藏語(서장어)의 바다)붙여서 使用(사용)하였으므로 ‘라마’(高僧(고승))라는 말에 붙여 다시 ‘바쥬라다라’를 더해서 ‘金剛持師(금강사)’라고 稱號(칭호)를 贈與(증여)하고 第(제)3代(대) ‘달라이’는 Altan汗(한)에게 ‘최키ㆍ걀포ㆍ라이ㆍ창ㆍ파’(법왕범천)라는 稱號(칭호)를 주었다.
  이렇게 하여 ‘달라이’라는 名稱(명칭)이 시작되었으므로 第(제)1代(대), 第(제)2代(대) ‘달라이’는 後(후)의 ‘티베트’人(인)이 追稱(추칭)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第(제)3代(대) ‘달라이’는 蒙古(몽고)에 新敎派(신교파)의 勢力(세력)을 扶植(부식)했고, 武力援助(무력원조)를 얻을 祿(녹)을 만든 것이다. 한편 Altan汗(한)이 1518年(년)에 죽고, 그의 아들 ‘셍게’가 卽位(즉위)하였고 또한 第(제)3代(대) ‘달라이’도 병이 들었다. 그가 死亡(사망)할 때 自己(자기)는 靈魂(영혼)이 蒙古族(몽고족) 中(중)에 轉生(전생)하리라고, 例言(예언)하였다. 그는 ‘셍게’의 長子(장자) ‘수밀ㆍ타이칭ㆍ봉ㆍ타이치’의 아들로서 1989년 正月(정월)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 후 2年後(년후)에 이 어린 化身(화신)인 ‘라마’는 드디어 ‘티베트’로 데려가 ‘요인텐걈초’라고 부르는 第(제)4代(대) ‘달라이’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티베트’의 ‘달라이ㆍ라마’라는 稱號(칭호)가 그 系譜(계보) 全體(전체)의 稱號(칭호)로 되었다. ‘티베트’人(인)은 ‘달라이ㆍ라마’는 그 肉體(육체)는 죽더라도 그 靈(영)은 다시 再現(재현)한다고 믿어 ‘달라이’가 죽은 後(후), 그 遺靈(유영)은 7週間(주간)을 지나서 다른 母胎(모태)에 들어가 9個月間(개월간)을 있다가 法主(법주)로서 轉生(전생)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달라이ㆍ라마’의 死後(사후)10個月(개월)만에 出生(출생)한 男子(남자) 中(중)에서 가장 神神的(신신적)인 奇蹟(기적)이 있었던 幼兒(유아)를 찾아서 그 中(중)에서 참된 轉生者(전생자)라고 믿어지는 자를 다음 代(대)의 ‘달라이ㆍ라마’로 정하는 것이다. ‘달라이ㆍ라마’로 決定(결정)된 嬰兒(영아)는 一切(일체)의 世俗的(세속적)인 環境(환경)에서 隔離(격리)하여 ‘달라이ㆍ라마’로서의 特殊敎育(특수교육)을 받아 成年(성년)이 되어서 비로소 卽位(즉위)한다.
  이와 같은 系譜(계보)로써 14代(대)의 現在(현재)에 이르렀다. 지금의 ‘달라이ㆍ라마’인 ‘텐진ㆍ걈초’는 1935年(년)에 13代(대)의 轉生(전생)으로 出生(출생)하였다.
  이와 같은 轉生思想(전생사상)은 ‘티베트’人(인)의 佛敎館(불교관)의 重要(중요)한 一端(일단)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轉生說(전생설)을 完成(완성)한 것은 第(제)5代(대) ‘로쟝ㆍ걈초’라고 한다. 그는 ‘달라이ㆍ라마’는 觀音菩薩(관음보살)의 轉生(전생)이라고 하였다. 특히 觀音(관음)의 轉生(전생)이란 思想(사상)의 根底(근저)에는 ‘티베트’의 古代(고대) 開國傳說(개국전설)이 밑바탕이 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즉 傳說(전설)에 阿彌陀如來(아미타여래)의 命(명)으로 ‘티베트’를 佛敎化(불교화)하려고 觀音(관음)이 원숭이로 化身(화신)하여 ‘티베트’에 誕生(탄생)하여 魔女(마녀)와 結婚(결혼)하여 6名(명)의 子孫(자손)을 낳고, 그 父親(부친)이 專心(전심)으로 애무하는 동안 털과 꼬리가 없어져서 人間(인간)으로 변했다. 그리하여 ‘티베트’人(인)은 원숭이의 子孫(자손)이라고.
  이 이야기는 佛敎(불교)의 傳來(전래)를 말하는 것이려니와 그들의 轉生思想(전생사상)과도 關聯性(관련성)이 있는 思考方式(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티베트’인은 佛敎(불교)를 이해함에 있어서 극히 現世的(현세적)이요 合理的(합리적)이었다는 것은 梵語佛典(범어불전)을 飜譯(번역)함에 있어서도 흔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므로 이 轉生思想(전생사상)도 그들의 사고방식에 固有信仰(고유신앙)과 佛敎觀(불교관)이 곁들여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들이 佛敎(불교)를 이해함에 있어서 印度(인도)인의 풍부한 想像力(상상력)이 그대로 ‘티베트’人(인)에게 理解(이해)된 것은 아니다. 이것이 佛典飜譯(불전번역)에 나타난다. ‘티베트’人(인)은 어디까지나 現世的(현세적)인 京鄕(경향)이 濃厚(농후)하다.
  ‘티베트’人(인)의 轉生思想(전생사상)은 이와 같은 그들의 佛敎(불교)관과 思考傾向(사고경향)을 理解(이해)함으로써 바로 理解(이해)가 될 것이다.
  無量壽經(무량수경)의 原文(원문)에 <生(생)을 脫(탈)하여>를 ‘티베트’人(인)은 <生(생)을 轉(전)하여>라고 譯(역)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死後(사후)에 다시 轉生(전생)된 生命(생명)을 생각한 것이다. 또한 大無量壽經(대무량수경)에도 <어느 때에는 人間(인간)이 되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諸佛(제불)의 出現(출현)도 있다>를 ‘티베트’역은 <극히 드물게 人間(인간)의 身體(신체)를 얻고 극히 드물게 佛(불)이 出(출)현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티베트’人(인)은 具體的(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佛說(불설) 阿彌陀經(아미타경)의 梵文(범문)에 <만일 저 거룩한 無量壽如來(무량수여래)의 佛國(불국)에 대하여 發源(발원)하려하여 現在(현재)하고 있거나 또는 이미 하였다면…>
  이것을 ‘티베트’譯(역)은 <極樂世界(극락세계)에 ‘낳을 것을’ 지금 마음에 원하든가 또는 이미 원하였던 거…>로 譯(역)하고 있는 것을 보드라도 그들의 佛敎觀(불교관)에서 능히 轉生思想(전생사상)이 나올법한 것을 알 수 있다.
  ‘티베트’佛敎(불교)는 印度(인도)의 密敎的(밀교적)인 中觀佛敎(중관불교)가 具體的(구체적)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密敎(밀교)가 重要(중요)한 部門(부문)을 形成(형성)한다. ‘라마’敎(교)의 大成者(대성자)인 宗喀巴(종객파)의 敎學(교학)은 顯密兩文(현밀문)으로 되어있는데 특히 당시 印度(인도)의 正統派(정통파)로서의 Prasaigika派(파)의 月稱造(월칭조) ‘入中論(입중론)’에 의한 甚深觀(심심관)의 般若智(반약지)의 一門(일문)과 伽中觀(유가중관) 自立派(자립파)라고 하는 ‘現觀莊嚴論釋(현관장엄론석)’에 의한 方便廣大行(방편광대행)으로 代表(대표)되는 印度中觀(인도중관)의 兩派(양파)의 宗學(종학)이 密敎化(밀교화)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本書(본서) 中觀(중관)의 密敎化(밀교화)에 있어서는 般若(반약)에 대한 方便門(방편문)이 形成(형성)되어 있는데 佛敎的(불교적)인 般若空(반약공)의 印度敎的(인도교적)인 世界(세계)에 應現(응현)되므로써 印度敎的(인도적) 世界(세계)의 凡夫(범부)가 成佛(성불)하여 佛凡一體(불범일체)의 宗敎的(종교적) 世界(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佛敎(불교)의 中觀(중관)의 密敎道(밀교도)이요 易行安樂(이행안락) 郎身成佛道(낭신성불도)로서의 西藏(서장)의 密敎(밀교)인 것이다.
  그리고 密敎(밀교)는 般若(반약)의 克治(극치)인 無住處涅槃(무주처열반)의 境地(경지)를 ‘歡喜(환희)’로 보고, 그를 스스로가 內證(내증)한 것이 바로 ‘大樂(대락)ㆍ俱生身(구생신)’이라는 形態(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은 물론 菩薩精神(보살정신)의 一(일)象徵(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西藏不詳(서장불상)의 歡喜佛(환희불)은 이러한 般若空(반약공)의 ‘티베트’적 表象(표상)이고, ‘달라이ㆍ라마’의 轉生思想(전생사상)도 또한 이러한 自內證(자내증)의 俱生身(구생신)으로서, 理解(이해)되며, 佛敎的(불교적) 般若空(반약공)의 印度敎的(인도교적)인 성불로서의 佛凡一體(불범일체)의 具現(구현)으로서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密敎(밀교)도 역시 大樂般若(대락반약)의 宗敎(종교)인만치 菩薩(보살)의 權化(권화)로서 ‘달라이ㆍ라마’를 觀音菩薩(관음보살)의 化身(화신)이라고 본 것은 당연한 것이요, 특히 中觀(중관)의 般若空(반약공)의 慧(혜)는 一切有情(일체유정)을 般若化(반약화)하는 비로 轉回(전회)되고 마는 것이니 阿彌陀佛(아미타불)의 信仰(신앙)에 歸着(귀착)되는 것이며,  方便門(방편문)으로 智印(지인), 大印(대인), 呪法印(주법인)의 方便(방편)에의 하여 淸淨法界(청정법계)를 實現(실현)하는 觀音(관음)의 權化(권화)는 西藏佛敎(서장불교)에서 觀音信仰(관음신앙)을 가져왔고 그리하여 西藏人(서장인)이 ‘달라이ㆍ라마’를 觀音(관음)의 化身(화신)으로 信奉(신봉)하고 ‘판첸ㆍ라마’를 阿彌陀如來(아미타여래)의 化身(화신)으로 믿어 尊仰(존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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