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경영학과 68졸) 동문

동국지 7집 편집장시절(1970년). 내무부장관과 동국대총장을 역임한 백성욱 박사를 인터뷰하러 갈 때 얘기다. 강의가 일찍 끝나는 수요일 오후3시 학교에서 출발하여 소사(지금의 부천)에 도착하니 거의 5시가 넘었다. 복숭아밭 한가운데 언덕 위 집 한 채가 백박사 거처였다.백 박사는 출가한 스님 출신이라 으레 그런 집일 것이려니 하고 갔었지만 조금은 상상 외의 집이었다. 대문은 잠겨있고, 문패에는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이라고 쓰여 있었다. ‘무슨 뜻일까?’ 하며 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내다보지도 않으면서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그냥 가고 다음에 오라고 한다. 재차 매달려도 소용없다. 후에 오겠노라고 말씀드리고 돌아왔다. 그 주 금요일 4교시 강의가 끝나고 ‘오늘은 쫓겨나지 않겠지’하고 가려는데 평소 안면 있던 수학과 여학생이 보였다. 

이번에는 쫓겨나지 않게 ‘여학생이랑 같이 가면 괜찮겠지’ 하는 마음에 동행을 부탁하니 쉽게 응해주었다. 같이 가서 스님이시니 먼저 일배를 올리고 앉아 대담을 하고 돌아왔다. 물론 그때 문패의 글을 여쭤보았다. 긍정적 마인드로 살라는 뜻의 금강경 마지막 구절이었다. 지금까지도 내 귀에 담겨져 있는 구절이다.

돌아오던 길에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비를 홀딱 뒤집어쓰고 둘이서 소사 복숭아밭 길을 걸어 내려왔다. 당시 집이 영등포라던 여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다음에 꼭 대접하겠노라” 고 했지만 아직까지 부도를 냈다. 이날 얻어온 ‘응작여시관’ 다섯 자는 지금까지도 갖고 산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추억으로는 1학년 때 배워 지금까지 하는 가장 큰 취미인 사진이다. 군 시절에 개인전을 한 번하며 미국에서 특선도 했다. 현재는 사진작가협회의 회원으로서 한국에서도 사진작가로 살고 있다. 직업은 따로 있지만 평생을 카메라를 끼고 살았다. 또 제자도 지도해보며 사진작가로 만들었다.

나이가 들면 어느 순간 취미 없이 산다는 것이 퍽 잘못 살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런 면에서 난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취미가 있으니 다행이다. 사진과 글을 끄적이는 수필가에다 좌우명까지 품어 자신감이 넘칠 수 밖에.

사랑하는 후배들이여 평생을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의 나만의 실력을 갖추고 후일 후회하지 않을 만큼만 오늘에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마음, ‘응작여시관’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비록 지금 용인 산골에서도 늘 행복해 할 수 있는 마음,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대학미디어센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